올해 6월 미국이 이란 핵시설을 기습 타격한 ‘미드나이트 해머(Midnight Hammer·한밤의 망치)’ 작전의 성공 뒤에는 숨은 주역이 있었다. EA-18G 그라울러와 EC-130H 컴퍼스콜 등 미군 전자전 항공기(전자전기)가 먼저 나서 이란 방공망과 무선지휘통제체계를 재밍(jamming·전파 교란)으로 무력화하며 ‘안전한 길’을 만들어 준 것. 덕분에 B-2 스텔스 폭격기 등 세계 최강 공중 자산은 요격 위험 없이 이란에 접근해 핵시설을 타격할 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전자장비를 지배하는 능력은 현대전의 승패를 가르는 핵심 요소이다. 개전 초 전자전기를 이용해 적 방공망과 통신망을 마비시키는 한편 적의 전파 방해를 막는 안티 재밍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필수 요인으로 자리 잡았다.
우리 군도 전자전기 확보에 뛰어들었다. 방위사업청은 올해 4월 제168회 방위사업추진위원회를 열고 원거리 전자전 수행 능력을 갖춘 전자전기 2대를 확보하기 위한 체계 개발 기본계획을 심의·의결했다. 전자전기 중에서도 우선 1단계에 속하는 ‘스탠드오프 재머(Stand-off Jammer)’부터 확보하겠다는 것. ‘스탠드오프 재머’는 적 방공망이나 레이더 탐지 범위 밖, 즉 원거리에서 강력한 전자파를 쏴 적의 레이더·통신 시스템을 교란하는 항공기나 장비를 말한다. 사업 기간은 내년부터 2034년까지로 사업비는 1조7775억 원이다. 방사청은 2일까지 전자전기 Block-Ⅰ 체계 개발 입찰 제안서를 받는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은 한화시스템과 손을 맞잡고 이 사업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KAI가 항공기 체계 종합 개발을, 한화시스템은 재밍 신호 생성기, 고출력 송신장치 등 전자전 장비 개발을 각각 맡는다. 한화시스템은 KAI가 생산하는 한국형 초음속 전투기 KF-21의 ‘눈’인 최첨단 국산 능동형 전자주사식 위상배열(AESA) 레이더를 개발하는 등 전자전 핵심 장비 개발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형 전자전기의 플랫폼이 될 항공기는 캐나다 봄바르디에사의 초장거리 비즈니스 제트기(중형 민항기) Global 6500. KAI는 이를 전자전기 임무에 최적화해 재설계하고 전자전 장비를 통합해 시험 평가까지 하는 체계 종합을 담당한다.
KAI는 현재 양산 중인 KF-21은 물론이고 국산 경공격기 FA-50, 한국형 기동헬기 수리온 등 다양한 항공기 플랫폼을 개발하며 체계 개발 및 플랫폼 개조·설계, 전자전 장비 등 각종 장비와 기체를 통합하는 능력을 증명해 왔다. 특히 KF-21 개발 과정에서 AESA 레이더는 물론이고 전자전 장비(ESM, ECM), 표적획득 장비(EO TGP), 적외선 탐지 장비(IRST) 등을 하나의 플랫폼에 통합하며 전자전기 개발에 준하는 역량을 이미 입증해 보였다.
이번 사업 명칭은 ‘전자전 항공기 체계 개발 사업’으로 KAI는 체계 개발 역량을 강조하고 있다. 아무리 우수한 전자전 장비를 개발해도 항공기에 제대로 통합하지 못하면 전자전기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어서다. 체계 통합 기술은 현재 전자전기 개발이 지연되고 있는 프랑스, 일본 사례에서도 핵심으로 꼽을 만큼 난도 높은 기술이다. 8년 6개월에 달하는 사업 기간만 봐도 KF-21(10년 6개월)에 준하는 고난도 개발 과정임을 알 수 있다. 그만큼 기술적 리스크 대응이 중요한 사업으로 평가된다.
KAI는 KF-21을 비롯한 다양한 항공기 개발 사업을 주관하면서 사업과 기술 리스크 대응 경험을 축적해 왔다. 이를 기반으로 1000회가 넘는 감항인증을 획득했다. 미 국방부의 군용 감항인증 기준인 MIL-STD-516에 부합하는 군용기 인증 역량을 갖춘 국내 유일 기업이기도 하다. KAI가 신형 전자정찰기를 국산으로 개발하는 ‘백두체계 능력 보강 2차 사업’의 체계 종합 개발 주관사로 참여 중인 점도 이번 전자전기 개발 사업에서 KAI를 유력 주자로 손꼽히게 하는 요인이다.
KAI는 ‘스탠드오프 재머’를 개발한 뒤 이를 토대로 폭격기 등 타격 전력과 편대를 구성해 함께 움직이는 ‘에스코트 재머(Escort Jammer)’도 개발할 계획이다. EA-18G 그라울러가 대표적인 에스코트 재머다. KAI는 KF-21을 ‘에스코트 재머’ KF-21EX로 개발한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 KAI 관계자는 “전자전기 기술은 미국, 러시아 등 소수 국가만 보유한 핵심 항공 기술로 해외에서의 기술 이전이 불가능해 국내 기술 확보가 매우 중요하다”며 “KAI는 이번 전자전기 개발에 이어 KAI 자체 플랫폼인 KF-21과 유무인 복합체로 기술을 발전시켜 국내 기술로 한국형 전자전 항공기를 완성하고 차세대 K방산 주력 수출 품목으로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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