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초였던 9월 22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가 여야 간 고성이 오가는 공방전으로 난장판이었습니다. 추미애 법사위원장이 국민의힘 의원들이 노트북에 붙인 종이의 문구 ‘정치 공작, 가짜뉴스 공장 민주당’을 문제 삼으며 “이렇게 하는 게 윤석열 오빠한테 무슨 도움이 되냐”고 비꼬았고, 이에 나경원 의원이 “여기서 윤석열 얘기가 왜 나오냐”고 맞섰습니다. 원래 국민의힘 의원들은 노트북에 나란히 붙은 피켓 문구가 화면과 사진으로 국민들에게 전달되길 바랬을지 모르지만 실제 보도된 것은 서로 고함을 치고 있는 추미애 의원과 나경원 의원의 투샷이었습니다.
나경원 국민의힘 의원이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열린 검찰개혁 입법청문회에서 퇴장 명령을 한 추미애 위원장에게 항의하고 있다. 2025.9.22/뉴스1
국회에서 의원들이 노트북 겉에 구호를 써 붙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하지만 세상에 말할 기회도 많고 채널도 많은 국회의원들이 굳이 피켓으로 항의하는 모습은, 한 발 떨어져 보면 어색하기 짝이 없는 장면입니다.
● 피켓과 피케팅의 기원
‘피켓(picket)’은 원래 경계병을 의미하는 군사용 용어에서 시작됐습니다. 전투 중인 군대 앞에 배치되어 적의 접근을 막는 병력이라는 의미에서 시작되어 ‘다른 사람들이 공장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배치된 파업 중인 노동자’라는 의미로 확장되었다고 합니다. 피케팅은 피켓을 들고 있는 행위를 말합니다.
한국에서는 1970~80년대 노동운동과 학생운동 속에서 피켓 시위가 널리 쓰였습니다. 대규모 집회가 제한되던 시절, 피켓은 소수 인원이 위험을 줄이면서도 의사를 드러낼 수 있는 장치였으니까요. ‘OO노동자 단결투쟁’ 같은 문구가 적힌 피켓은 집단의 결속을 보여주는 상징이었습니다.
2000년대 들어 헌법재판소가 1인 시위를 합법으로 인정하면서, 피켓은 시민들의 일상적인 정치 표현 수단으로도 자리 잡았습니다. 국회 앞이나 정부청사 앞에서 교대로 피켓을 들고 선 이들의 모습은 서울의 흔한 풍경이 되었습니다.
● 국회 안으로 들어온 피켓
그러면 피켓이 국회 안으로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언제일까요? 동아일보 데이터베이스의 기록을 중심으로 유추해보았습니다.
1992년 제14대 총선을 앞두고, 공천 탈락설이 나돌던 정웅 의원 지역구민들이 피켓을 들고 침묵시위를 벌였습니다. 정치인보다는 지역민들이 의사를 드러내는 방식이었습니다.
민주노동당 의원들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여야 합의에 항의하는 피켓 시위를 벌이고 있는 가운데 김원기 국회의장이 본회의 개회를 선언하고 있다. 2004년 12월 31일. 동아일보 DB
이후 2009년 자유선진당 임영호 의원이 ‘세종시 특별법 제정하라’는 피켓을 들며 항의하는 등, 피켓은 국회 내 익숙한 장면이 됐습니다.
민주당과 자유선진당 의원들만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자유선진당 임영호 의원이 ‘세종시특별법 제정하라’는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2009년 7월 27일. 동아일보 DB
● 급기야 국회의원 노트북에 붙기 시작한 피켓
국회의원들이 노트북에 문구를 붙이기 시작한 것은 2011년 즈음입니다. 당시 국회 교과위 회의에서 야당 의원들은 ‘반값 등록금 약속 지켜라’라는 문구를, 여당 의원들은 ‘민주당 정권 10년 동안 등록금 2배 인상 사과하라’는 문구를 노트북에 붙였습니다. 서로 다른 문구를 맞붙이며 회의를 진행하는 모습은 여야간의 갈등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싶어하는 기자들에겐 쉬운 취재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런 관행이 국회에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김상곤 교육부장관 인사청문회에서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김 후보자의 자질문제를 거론하며 항의하고 있다. 2017년 6월 29일. 동아일보 DB.피켓은 한때 시민들에게 필요한 도구였지만, 국회 안에서는 그저 식상한 장치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미 우리는 너무 많은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가진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과거의 개념으로 ‘포토제닉’하다고 해서 유권자의 마음을 얻는 게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정치가 관심을 얻으려면, 이제 피켓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설득해야 합니다. 과거 흑백 프린터로 뽑아 붙이던 문구는 이제 정교하게 인쇄된 인쇄물로 바뀌었지만, 이를 정치 발전으로 보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오히려 피켓이나 소품을 활용해 벌이는 시선 끌기 경쟁은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상징이 아닐까요. 기자들은 왜 그런 장면 만을 보도하냐는 비판도 많습니다. 저 스스로 항상 갈등하는 지점입니다. 자극적인 장면에 카메라가 가는 이유는 ‘그림이 되는 게 뉴스가 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혼자서 육하원칙에 따라 정책에 대해 설명하는 것보다는 여러명이 통일된 소품을 준비해 시각을 끄는 게 노출에 더 유리하다는 것을 국회의원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카메라를 의식한 일들이 많이 벌어집니다. 요즘에는 의원실에서 자체 제작하는 ‘짤’을 염두에 둔 행동도 많다는게 현장의 해석입니다.
● 유권자들의 의식 수준을 못 따라오는 정치 문화
시대의 변화에도 변하지 않은, 낡은 시위 방식은 이제 역사 속으로 보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 이번 주였습니다. 물론, 상임위 위원장 자리를 차지한 6선의 여당 국회의원이 상대방 당을 향해 모멸감을 주는 표현을 하는 것이 국민들 다수의 마음을 시원하게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국민들이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중진 의원들의 막말과 구태는 조용히 지지율로 반영되고 있습니다. 이슈의 중심이 되었다고 해서 그게 마냥 유리한 것만은 아니라는 무거운 경고를 하면서 누가 먼저 선진화된 정치를 할지 지켜보고 있는 것 아닐까요?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보이셨나요? 댓글로 여러분의 생각을 보태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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