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노동당 영화과가 선택한 인재, 따뜻한 남쪽 나라 감독이 되다[주성하의 북에서 온 이웃]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0월 5일 1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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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연출가의 새 삶을 살고 있는 오진하 감독.
한국에서 연출가의 새 삶을 살고 있는 오진하 감독.

올해 7월 서울 강서구 남북통합문화센터 대강당에선 연극 ‘백학’이 초연됐다. 연극은 6·25전쟁이 끝날 무렵 북한 인민군 포로가 돼 아오지 탄광에 끌려간 국군 소위와 하사의 삶을 그렸다. 70대 고령이 된 두 전우는 조국으로 귀환하기 위해 탈북을 시도하다 적발돼 목숨을 잃는다.

“내 고향 남쪽으로 가고 싶다. 내 꿈은 언제 이루어지나.”

백학은 시베리아 동토에 머물다가 우리나라에서 월동하는 겨울 철새 두루미를 말한다. 북한 최북단에서 따뜻한 남쪽 고향으로 오고 싶어 하는 국군 포로들의 희망과 좌절이 공연 내내 관객 가슴을 흔들었다.

백학 극본과 연출은 탈북민 출신 오진하 감독이 맡았다. 연극엔 그가 살아온 인생이 녹아 있었다. 아니, 오 씨가 살아온 길은 연극보다 더 극적이었다.

연극 ‘백학’ 출연진이 관객들 환호에 화답하는 박수를 보내고 있다.


● 인민군에 끌려간 세브란스 학생
오 씨는 1964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남쪽에서 북으로 끌려온 의용군 출신이었다.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 부친은 서울에서 세브란스의과대학에 막 입학한 상태였다. 부친의 형 역시 세브란스의대 3학년이었다.

형제의 아버지, 즉 오 씨의 할아버지는 경북 영양군 부자였다. 부친 말에 따르면 영양군 감천리 높은 산에서 내려다보이는 땅 대부분이 할아버지 것이었다. 그래서 두 아들을 서울에 유학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모든 것을 바꾸었다. 인민군이 전쟁 사흘 만에 서울을 점령하자 형제는 피난 갈 새도 없었다. 당시 학교 교수들은 군 트럭에 실려 북한으로, 학생들은 강원도 철원으로 끌려갔다. 철원에서 3일 동안 총 쏘는 법만 가르친 뒤 의용군이라며 전선으로 내몰았다.

부친은 견장도 없는 군복을 입고 소속 대대를 열심히 따라갔는데, 대전에 도착도 하기 전에 대대가 전멸했다. 그날 부친이 식당 근무에 뽑혀 나무하러 가느라 숙영지를 떠났을 때 국군이 습격했다. 살아남은 사람은 2명뿐이었다.

부대가 없어지자 부친은 고향으로 도망갔다. 하지만 가는 도중 산에서 또 인민군에 잡혀 1사단으로 끌려갔다. 북한군 1사단은 다부동 전투에서 백선엽 장군이 이끈 국군 1사단과 싸워 거의 궤멸당한 부대다. 부친은 전투도 해 보기 전에 미군 전투기 기총소사에 맞아 다리를 크게 다쳤다.

부친은 차에 실려 중국 단동에 있는 북한군 중앙병원으로까이송됐다. 오랜 입원 생활 끝에 얻은 것도 있었다. 병원 간호사였던 모친과 사랑을 키운 것이다.

전쟁이 거의 끝날 무렵에야 퇴원했다. 세브란스의대의 권위는 북한에서도 인정받아 부친은 김일성대에 입학하게 됐다. 낮에는 건설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대학에서 공부하다 소련 유학생으로 뽑혔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소련군 태평양함대에 파견돼 군함 기관실 일을 배웠다. 북한으로 돌아온 부친은 원산 제1함대가 조성될 때 기관 담당 기술자로 발탁됐다.

1959년 일본 니가타항에서 재일 한인들이 처음으로 귀국할 때 동원된 선박은 소련 군함을 개조한 화물선이었는데, 부친은 그 배에서 소련 군인들과 일했다. 하지만 소련의 신원 검증은 엄격했다. 부친은 고향이 남쪽이란 이유로 곧 평양으로 되돌려 보내졌다.

부친의 다음 일은 새로 건설된 평양종합방직공장 기술자였다. 오 씨가 태어났을 때 부친은 공장 노동지도원이었고, 모친은 공장 탁아소 보육원이었다.

함께 인민군에 끌려간 부친의 형도 전쟁에서 살아남아 유학생으로 선발돼 독일에서 의학을 배웠다. 그는 은퇴할 때까지 조선노동당 군사위원회 직속 818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했다.

818연구소는 화학과 생물 특히 세균을 전문 연구했는데, 외형상으론 주사 약품을 개발한다고 했다. 군사위원회에 소속된 진짜 이유는 관련 분야 무기화 연구로 추정된다. 오 씨는 큰아버지가 생체 실험 관련 독일어 서적을 늘 들여다봤고, 가끔 부친과 만났을 때도 생체 실험 관련된 끔찍한 이야기들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연구소 연구원 대부분은 과거 일본이나 한국, 외국에서 공부했거나 고향이 남쪽이어서 출신 성분이 나쁜 수재들이었다. 군 계급은 소좌부터 대좌까지였는데, 평양 시내에서 경무부대원들이 깍듯이 인사했던 것으로 봐서 특별한 신분증이 있었던 것 같았다.

2010년 한 공연을 마친 뒤 관객들과 이야기하는 오진하 씨.


● 수상했던 아버지의 삶
오 씨가 태어난 평양 선교구역은 거대한 방직공장 마을이었다. 공장은 직원만 1만2000명이었고 면적은 67만㎡, 건물 넓이는 15만㎡에 이르렀다. 산학협동 시범 기업체로서 자체 기술기능공학교와 공장대학도 운영했다. 공장 직원 자식들은 커서 대개 부모를 이어 방직공장 노동자로 일하라고 권유받았다.

부친은 공장 법규 지도원 겸 공장 소속 공산대학 철학 강좌장을 겸하고 있었다. 오 씨 눈에 비친 부친은 이상한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김일성 사상으로 무장했어야 마땅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공책에 뭔가 계속 적었다. 그러다간 어느 날 내용이 적힌 종이를 쭉쭉 찢어 아궁이에 불태웠다.

부친이 뭘 적는지 궁금했던 오 씨는 가끔 공책을 훔쳐봤는데, 어린 그가 봐도 체제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반동 사상’임이 분명했다. 어느 날 부친은 수기를 쓰기 시작했다. 내용을 훔쳐보니 전쟁 때 누가 죽었다는 기록밖에 없었다. 이런 수기나 일기는 가택수색을 당했을 때 죽음을 부르는 증거이기 때문에 부친은 숨겨 놓지 않고 불태워 버렸다.

아버지와 어울리는 사람도 전부 6과 대상이었다. 6과는 남쪽 출신과 일본 귀국자를 맡아 관리하는 부서를 말한다. 이들은 모여 술을 마시다가 북한 체제를 비판했고 “왜정 때도 이보다 나았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체제 비판적인 사람들이 모이다 보니 서로 신고하는 사람도 없었다. 남쪽 출신은 남쪽 출신끼리 사돈을 맺었다. 출신 성분이 나쁜 ‘까치’끼리 어울린 것이다.

평생 고향을 그리던 부친은 1997년 62세로 세상을 떠났다. 부친의 형도 2년 앞선 1995년에 63세로 사망했다. 오 씨는 부친과 큰아버지가 ‘고난의 행군’ 때 영양 공급을 제대로 받지 못한 탓에 오래 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2017년 단편 독립영화를 제작할 때 북한 규찰대 역을 맡은 오진하 씨(왼쪽)와 보안원 복장을 한 배우.
2017년 단편 독립영화를 제작할 때 북한 규찰대 역을 맡은 오진하 씨(왼쪽)와 보안원 복장을 한 배우.


● 수륙양용 장갑차를 몰다

1980년에 만 16세가 된 오 씨는 평양산업기술고등중학교 졸업반이 됐다. 8월 졸업을 앞두고 3월 어느 날 수업 중에 불러내더니 입대하라고 했다.

그가 배속된 부대는 113중도하여단이었다. 여단 산하 선견도하(상륙작전 또는 침투작전 시 먼저 투입되는 수륙양용차)와 개척 공병, 진지 공병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부대 중 오 씨는 ‘까연대’ 소속이었다. ‘까’는 러시아말로 K를 의미한다. 까연대는 소련제 K-61 수륙양용장갑차를 운용했다. 1개 소대원이 서서 모두 탈 수 있는 이 장갑차의 자체 방어 능력은 형편없어 5.56mm탄도 관통할 정도였다.

그래도 북한에선 귀하고 비싼 장비를 다루다 보니 이 부대에서는 신병 훈련도 1년이나 했다. 다행인 점은 주둔지가 대동강 옆 평양시 대성구역 안악동에 있다는 것이었다. 집이 가까우니 심리적으로 안정이 됐다.

오 씨는 신병 훈련 6개월째에 우수한 능력을 인정받아 수륙양용장갑차 운전병 양성소에 파견됐다. 양성소 학제는 1년이었다.

오 씨가 양성소에서 부대를 관찰하니 ‘기본 중대’인 까연대 7대대 1중대에 가야 입당도, 승진도 빨랐다. 기본 중대는 김일성이 현지 시찰했다는 중대여서 대원 선발도 까다로워 양성소 최고 성적을 받아야 했다. 최고만 엄선한 중대라 상부에서 훈련 판정을 나오면 기본 중대가 출동했다.

기본 중대에 뽑히는 것을 목표로 한 오 씨는 잠을 자지 않고 공부하며 훈련했다. 양성소를 졸업할 때 동기 217명 중 2명만 선발하는 기본 중대 대원이 됐다.

그가 부운전수로 발령받은 115호 장갑차는 1968년 평양 대규모 수해 때 김일성이 타고 시내를 순찰한 차량이었다. 일명 현지 지도 차였다. ‘김일성 사적물’이기 때문에 늘 세워 두고 정비만 했다. 도하 훈련 때는 다른 차량을 운전했다.

115호 장갑차 운전병은 엄청난 영예였다. 다른 부대에서 참관을 오면 오 씨가 차량의 ‘혁명역사’를 해설해 주었다. 보상도 확실했다. 제대할 때 중앙대학 추천을 받았다. 오 씨 앞길은 탄탄대로인 듯했다. 하지만 운명은 생각대로 굴러가지 않았다.

2017년 암 진단을 받은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왼쪽)와 함께 강원도를 찾은 오진하 씨. 두 사람은 북한군 4군단에서 같이 복무한 인연이 있다. 김 대표는 7년 간의 암 투병 끝에  지난달 12일 사망했다.
2017년 암 진단을 받은 김성민 자유북한방송 대표(왼쪽)와 함께 강원도를 찾은 오진하 씨. 두 사람은 북한군 4군단에서 같이 복무한 인연이 있다. 김 대표는 7년 간의 암 투병 끝에 지난달 12일 사망했다.


● 예성강 도하훈련 우승자
1985년 8월 15일, 부대 에이스로 인정받고 분대장으로 승진한 그는 장갑차를 몰고 광복절 기념 대규모 열병식에 참가했다. 김일성광장을 통과하며 주석단을 쳐다보니 김정일이 총참모장인 오극렬 귀에 뭐라고 열심히 말하고 있었다.

주석단과 시내를 통과해 부대로 복귀하려는데 갑자기 지시가 떨어졌다. 장갑차를 몰고 황해도 배천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짐도 챙기지 못한 채 배천에 가 보니, 그의 부대는 4군단 직속으로 소속이 바뀌어 있었다.

김정일이 수륙양용장갑차 부대를 보고, 저 부대는 전쟁이 나면 제일 먼저 남진해야 하는 부대이니 평양에 두지 말고 최전방에 보내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새로운 주둔지는 허허벌판이었다. 강 건너에 한국 해병대 2사단이 있었다. 북한은 6·25전쟁 때 이곳을 통해 북한군 최정예 부대 방호산의 6사를 도하시켰다.

새 병영을 짓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4군단 소속이 되면서 새로 파견 나온 중대장과 정치지도원이 수륙양용장갑차에 대해 전혀 모른다는 것이었다. 당시 중대 초급단체위원장을 겸했던 그는 어느 날 군단에 올라갔을 때 군단장을 직접 찾아갔다.

“새로 부임한 군관들이 부교 도하부대 출신이라서 수륙양용차 같은 중장비에 대한 전문성이 없어 전투력을 발휘할 수 없다. 수륙차 전문 지휘관을 보내주면 좋겠다”고 하자 중장인 군단장이 호탕하게 웃으며 “부대 전투력을 생각하는 기특한 분대장이구먼” 하더니 문제의 지휘관 몇 명을 변경 배치하는 조처를 해 주었다. 옆에 있던 군단 정치위원도 “앞으로 문제가 있으면 전화를 직접 하라”며 격려했다.

이듬해인 1986년 가을 예성강에서 도하작전 훈련이 있었다. 각종 악조건을 가정하고 누가 가장 빨리 돌파하는지 시간을 쟀는데 오 씨가 운전한 장갑차가 1등을 했다.

군단 정치위원이 그를 알아보더니 옆에 있던 참모장에게 “이 동무에게 일주일 휴가를 주라”고 지시했다. 당시 북한군은 전군에서 휴가 제도를 없애고 사망 또는 결혼식만 3일씩 휴가를 줄 때였다. 엄청난 특혜를 받은 오 씨는 모처럼 평양 집에 와서 휴식을 취했다.

한국 입국 1년 뒤인 2004년 오하진 씨. 북한군 사관장 복장을 하고 배우들에게 북한군 경례 자세 등을 가르쳤다.
한국 입국 1년 뒤인 2004년 오하진 씨. 북한군 사관장 복장을 하고 배우들에게 북한군 경례 자세 등을 가르쳤다.


● 눈앞에서 본 수백 명의 죽음
군단 정치위원 눈에 든 뒤로 군 생활은 다시 잘 풀렸다. 7년 만에 노동당에 입당하게 됐는데 입당 보증인이 군단 정치위원이었다. 입대 8년 차엔 사관장이 됐다. 사관장은 중대에 한 명만 있는 계급으로 하사관 중 제일 높았다.

사관장 시절이던 1988년 2월 평생 잊지 못할 일을 경험했다. 어느 날 그에게 평양-개성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 후방 지원 물자(주민들이 군대에 지원하는 식품, 의류품, 노동보호물자)를 갖다 주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평양-개성 고속도로는 1987년 건설을 시작했는데 군인들이 대거 동원됐다. 그는 차에 물자를 싣고 공사 최대 난관이던 금천군 다리 건설 현장에 갔다. 무지개처럼 생긴 긴 아치형 교량이었다.

다리 아래 늘어선 군인 천막에 도착하니 물자를 받을 사람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맨 끝의 식당으로 쓰는 천막에 가 보니 막 차려 놓은 수백 명분 밥그릇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취사병들이 밥을 지어 놓고, 200m 정도 떨어진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부대원들을 데리러 간 듯싶었다.

기다리려고 담배를 꺼내 피우는데 갑자기 엄청난 아우성이 들렸다. 놀라서 고개를 쳐드니 짓고 있던 교량이 통째로 무너져 내렸다. 공사 기간을 맞춘다며 겨울에 시멘트가 굳기도 전에 또 몰탈을 붓다 벌어진 사고였다.

다리 위에 바글바글하던 군인들도 추락했다. 몰탈도 함께 흘러내려 시신 찾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주변에 있던 군인 100여 명이 맨손으로 몰탈을 헤치며 시신을 찾기 시작했다. 들것들이 오는 것을 보니 형체 없는 살점들만 실려 있었다.

한참 지나 구급차들이 왔다. 오 씨는 다리가 후들거려 주저앉아 버렸다. 비통한 울부짖음으로 가득한 현장에 차마 갈 생각을 못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다른 막사로 가서 부대에 전화했다. 당장 돌아오라고 했다.

얼마나 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개 대대쯤 몰살당한 것으로 추정됐다. 그는 지금도 김이 올라오던 그 알루미늄 밥그릇들을 잊을 수가 없다.

2015년 광화문 앞을 지나는 오진하 씨. 서울에서 10년 넘게 살았지만, 이날 광화문에 처음 와 봤다.


● 부유했던 운전기사의 삶
어느덧 10년이 흘렀다. 1990년 10월, 제대를 앞두고 김일성대 생물학부에 추천을 받았다. 여단 전체에 1장만 할당되는 김일성대 추천권을 그가 받은 것이다. 추천을 받는다고 입학하는 것은 아니었다. 김일성대 시험을 봤지만 떨어졌다.

김일성대 시험 합격은 부대에서 가장 우수한 군인이거나 공부를 잘하는 것과는 크게 관련이 없다. 고위 간부 자식이거나 김 씨 일가 호위병 출신은 빈 시험지를 내도 붙지만, 일반 군단 출신에 남조선 혈통인 그는 김일성대에 입학할 만한 좋은 조건이 아니었다.

제대하고 집에 오니 대외경제사업부 해외물자공급소장 운전사로 발령이 났다. 집에서 없는 인맥을 다 동원해 힘써 준 덕분이었다.

공급소는 노동당 직속 의사당재정경리부 지시를 받아 해외에서 물자를 사 오거나, 해외 공관에 각종 물자를 보내 주는 일을 담당했다. 가령 김정일의 특각(별장)을 지을 때 중동 최고 카펫, 유럽 호화 샹들리에 등을 구입하는 것이다.

사치품이라 해서 마음대로 수입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중앙에서 사람이 내려와 사진을 내밀며 “이것이 장군님이 추천한 것”이라고 하면, 전 세계를 돌며 꼭 그 물건을 찾아내야 했다. 이렇게 달러를 주무르는 부서 책임자의 운전사는 누구나 부러워할 자리였다.

하지만 소장 운전사 자리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군에서 중대를 인솔하고 지시하다가, 갑자기 간부 발바닥을 핥아야 하는 일이 내킬 리가 만무했다. 공급소 직원들은 대개 평양외대나 국제관계대 등을 졸업한, 고위 간부 집 자식들이었다. 이들은 걸핏하면 외국 출장을 다니고 평양에서 제일 비싼 외화식당만 찾아다녔다.

공급소에 점심을 싸 오는 사람은 그가 유일했다. 점심시간이 되면 직원들이 뿔뿔이 차를 타고 외화식당에 가서 먹고 오고, 퇴근 후에도 돈 있는 사람끼리 또 외화식당에 가는 것을 보니 자신의 처지가 초라해 보였다.

반년쯤 소장 운전사를 하다가 이직을 선택했다. 이번에 얻은 직업은 지방공업부 일용공업총국 운전기사였다. 알고 보니 최고의 직장이었다.

총국은 전국의 화장품이나 신발 공장 같은 생필품 공장에 자재를 공급했다. 지방 공장들에는 갑 중의 갑으로 행세했다. 전국의 공장 지배인들이 자재를 받겠다고 총국 앞에 길게 줄을 섰다. 빈손으로 오지 않고 돼지를 몇 마리씩 싣고 오거나 담배, 술 같은 뇌물을 잔뜩 준비해 왔다.

총국 운전기사로 있는 동안 육류나 술 같은 것은 늘 넘쳐났다. 2년 정도 어느 간부 부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 하지만 1993년 말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하고 이 직장도 그만두었다.

2012년 서울 대학로에서 연극을 하던 오진하 씨(오른쪽). 배우들에게 북한군의 억양과 자세 등을 가르치고 있다.


● 공포의 숙청 광풍
1993년 12월, 그는 평양 간리역에 가서 화물열차에 실린 자재를 싣고 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화물차 여러 대가 역 앞에 늘어서 화물열차가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견장도 달지 않은 군복을 입은 건장한 남성 30~40명이 오더니 “당장 대가리 박아”라고 고함을 질렀다. 동시에 앞에서 강력한 서치라이트가 켜져 눈이 부셔 앞을 볼 수가 없었다.

‘이게 뭐지’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머리를 땅에 박고 있는데 화물열차가 들어왔다. 차들을 비추던 불빛이 잠시 화차로 옮겨간 틈을 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엿보았다.

화차에서 머리에 마대 같은 것을 쓴 20명 가까운 남성들이 꽁꽁 묶여 짐짝처럼 던져지고 있었다. 옷을 보니 풍채 좋은 고위 군관들이 분명해 보였지만 신발도 신지 않았다. 오 씨를 감시하던 남성들이 우르르 몰려가 그들을 차에 싣고 사라졌다.

훗날 들으니 그들은 소련 유학파 고위 군관을 대규모로 숙청한 ‘프룬제 군사대학 사건’에 휘말려 평양에 송환된 군관들이었다. 하지만 당시 아무것도 모르던 그는 공포에 질렸다. 물자를 받으려 수없이 와야 했던 간리역이 갑자기 지옥처럼 느껴졌다. 무자비하게 겁을 주며 뒤를 보지 말라고 명령하던 인간들 모습이 자꾸 어른거리고 그들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이곳 아니면 벌어먹을 데 없겠나’하는 생각에 다시 직업을 옮겼다. 이번에는 중앙당 38호실 소속 고려봉사지도국 택시 운전기사였다. 고려호텔과 양각도호텔 앞에 택시를 세워 두고 손님을 태우는 일이었다. 하지만 북한에서 택시를 이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 사실상 차를 세워 놓고 빈둥거리는 일이 잦았다.

일을 하면서도 대학에 가고 싶다는 소원을 버리진 않았다. 다른 대학을 갈 수도 있었지만 그가 가고 싶은 대학은 평양영화연극대학 연출과 하나뿐이었다.

오 씨는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했고 공연하는 것을 즐겨 했다. 군에서도 방송 원고를 많이 썼고, 충성의 노래 모임을 할 때면 늘 중대를 우승시켰다. 장래 희망도 연출가였다.

꿈을 놓지 않으니 기회가 찾아왔다. 북한은 군 사관장 출신은 특별히 당에서 관리한다. 인원 100명이 넘는 중대에서 최고로 인정받은 인재였기 때문이다.

1994년 봄, 당 비서가 그를 불렀다. “중앙당 선전선동부 영화지도과에서 동무를 평양영화연극대학에 입학을 추천했으니 다음 주에 대학에 가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런 행운이 찾아왔는지 어리둥절했다.

군에 있을 때 인민군 신문사 기자와 인터뷰한 덕분이었음을 나중에 알았다. 그는 당시 “꼭 영화연극대학에 가서 연출을 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는데, 노동당 선전선동부 영화지도과에서 그 인터뷰를 봤는지 “이 사람이 쓸 만해 보이는데 공부를 한번 시켜 보자”고 결정 난 것이다.

대학 입학이 결정된 뒤 위에서 시킨 대로 “당의 배려로 남조선 출신 자녀도 차별 없이 최고의 기회를 받는다”는 감사의 말을 수없이 하고 다녔다.

2012년 뮤지컬 감독으로 데뷔한 직후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있는 오진하 씨.


● 탈북을 꿈꾸다
1994년 4월 영화연극대학 첫 개교일이 왔다. 학교가 전투 동원령을 하달 받은 듯 어수선했다. 교실에도 들여보내지 않고 입학생들을 모아 놓더니 소대(반)별로 벼 뿌리를 캐 오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식량이 부족해 벼 뿌리를 대용 식량으로 사용한다고 했다. 기가 막혔다.

소대에선 과제를 수행해야 한다며 무엇을 가져올 수 있을지 개인별로 물었다. 누구는 석탄을 갖고 오기로 했고, 누구는 여자 기숙사 천장 수리용 목재를 갖고 오기로 했고, 누구는 휘발유를 가져오기로 했다. 오 씨는 목재에 칠할 래커와 시너를 가져오겠다고 했다.

가만히 보니 아무것도 가져올 능력이 없는 사람은 대학 청소를 하거나 농촌 동원에 나가야 했고, 갖고 온다고 하는 사람은 2개월 동안 놀게 했다. 그는 농촌 동원 기간이 끝날 때까지 놀다가 래커와 시너 한 통씩을 갖고 올 생각이었다. 선배들에게 물어보니 물자는 구하는 놈만 구해 올 뿐, 갖고 가지 않아도 처벌은 없다고 했다.

그렇게 대학에 이름만 걸어 놓고 집에서 놀았다. 5월이 지나고 6월에 들어서니 다들 당장 남북통일이 될 듯한 분위기에 취해 있었다. 어디 가나 흥분제 먹은 사람들처럼 ‘곧 수령님께서 김영삼과 회담하고 통일을 선언한다’고 수군거렸다. 동시에 불안한 소문도 같이 돌았다. 여기저기서 체포되어 사라진 사람이 많아졌다.

동네 술친구들도 갑자기 하나둘 없어지기 시작했다. 오 씨는 제대 후 동네 30대 초반 친구들과 자주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다 보면 체제에 대한 불만이 오갔다. 그런데 보위부에서 어떻게 알았는지 이들을 비밀리에 체포하기 시작했다.

가까운 사이인 제대 군관 형이 먼저 사라졌다. 보위부 소좌인 친구에게 달려가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봐 달라고 하니 그도 침울한 표정으로 “나도 오늘내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며칠 뒤 소좌도 사라졌다. 그의 부인에 따르면 출근길에 군관 3명에게 계단에서 연행됐다는 것이다. 나중에 들었지만, 두 사람은 혹독한 고문을 받고 특별재판소에 끌려가 처형됐다고 한다.

가까운 주변 사람이 하나둘 잡혀 가니 ‘나는 언제 끌려갈까’ 불안해졌다. 연출 공부고 뭐고 두려워서 견딜 수 없었다.

‘안 되겠다. 하루빨리 북한을 떠나야겠다.’

그는 지도를 구입했다. 두만강으로 갈까, 압록강으로 갈까. 중국에 넘어가면 어딜 갈까. 당시는 본격적인 탈북도 이뤄지지 않던 때라 한국에 갈 생각까진 못했다.

대학에선 왜 나타나지 않느냐고 찾기 시작했다. 그는 시간을 벌기 위해 평양고려병원에 입원했다. 대학에 가지 않을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병상에 누워서도 도망갈 생각뿐이었다.

평양고려병원은 백이 좋아야 입원하는 곳이었다. 같은 병실에 입원한 노동당 재정경제부 부부장 아들과 친해져서 군인들이 경비를 서는 그의 집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집이 궁궐이나 다름이 없었다. 김정일이 하사한 선물이 가득했다. 사우나가 있는 집은 처음 봤다. 거실 간식 바구니엔 외화 다발이 가득했는데 필요한 만큼 지갑에 넣고 나가면 다시 돈이 바구니에 채워지는 식이었다.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부부장 아들도 갖고 싶은 것이 있었다. 일본 미야타 자전거였다. 당시 평양에선 구할 수 없었다. 탈북 경비가 필요하던 오 씨는 만경봉호가 입항하는 원산항에 있던 친구에게 부탁했다. 겨우 미야타 중고 자전거를 200달러에 구입했다. 부부장 아들은 수고했다며 1000달러를 주었다. 탈북 자금이 마련됐다. 언제 도망갈지만 결정하면 됐다.

2019년 국군포로를 주제로 한 독립영화 ‘버려진 영웅들 43호’ 감독을 맡았을 때의 오진하 씨.
2019년 국군포로를 주제로 한 독립영화 ‘버려진 영웅들 43호’ 감독을 맡았을 때의 오진하 씨.


● 마침내 한국에 도착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7월 9일 정오에 김일성 사망이 발표된 것. 온 나라가 눈물바다가 됐다. 병원 원장이 오더니 “수령님이 돌아가셨는데 편하게 병실에 누워 있을 수는 없다”며 당장 퇴원해 소속 기관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오 씨는 10일에 퇴원했다. 15일쯤 평양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동안 인연을 쌓았던 사람들에게 인사나 하자는 생각으로 찾아다니다가, 보위부가 사람들을 체포할 형편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김일성 죽음 직전에 보위부 내부에선 숙청 광풍이 불고 있었다.

김일성이 죽기 몇 년 전부터 호위사령부와 보위부, 중앙당 사람들은 김일성을 ‘아바이’라고 불렀다. 이는 김정일에게만 충성한다는 것을 공공연히 과시하는 것이었다.

1994년 7월 25일 평양에서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이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하기로 확정되자, 김정일은 더욱 불안해졌다. 비밀경찰조직 보위부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충성할지 떠봐야겠다고 생각한 김정일은 보위부 간부들에게 통일관을 적어내게 했다.

눈치 없이 배운 대로 “수령님 대에 꼭 조국을 통일하겠습니다”라고 적어낸 간부들은 얼마 뒤 모두 군복을 벗어야 했다. 김정일이 “이런 놈은 내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던 것이다.

숙청 바람은 김일성이 죽은 날부터 더 심해졌다. 김일성 동상 앞에서 “수령님이 서거하시니 우린 어떻게 합니까”라고 울부짖은 간부는 바로 옷을 벗었다.

“비록 수령님은 서거하셨지만, 우리에겐 김정일 장군님이 있습니다”라고 해야 살 수 있었다. 중앙당 조직부가 책임지고, 보위사령부를 칼잡이 삼아 보위부를 감시하고 잡아갔다. 보위부가 제 코도 닦지 못할 상황이 되니 탈북하려던 마음을 고쳐먹게 됐다.

애도 기간 평양 시민은 출근하면 직장별로 조문하고 퇴근해선 가족 단위로 조문하고 주말에는 당세포 단위로 조문했다. 눈을 뜨면 조문했다.

탈북을 꿈꾸느라 몇 달 동안 대학에 가지 않으니 퇴학 처리가 돼 있었다. 2000년 말 탈북을 다시 결심하고 중국으로 갈 때까지 오 씨는 평북에서 군(郡)당학교를 다녔고, 졸업 뒤엔 지방공장 체험 등을 하며 지냈다.

중국에선 3년 가까이 숨어 살며 한국행을 모색했다. 2003년 9월 제3국을 거쳐 한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그는 ‘평양에선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한국에서 연출 공부를 다시 해서 꼭 영화, 연극 연출자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2016년 탈북민들이 만든 연극 ‘풍계리 진달래’에서  남자 주인공을 맡은 오진하 씨(오른쪽).
2016년 탈북민들이 만든 연극 ‘풍계리 진달래’에서 남자 주인공을 맡은 오진하 씨(오른쪽).


● 대학로 무명 배우로 시작
조사를 마치고 2003년 12월 서울 강서구의 한 임대아파트에 짐을 풀었다. 이제부터 어떤 삶을 살아갈지는 오로지 그의 결심에 달렸다. 연출을 하고 싶고 연출가로 이름을 남기고 죽고 싶었지만 나이 40세에 아무런 경력도 없이 관련 분야에 뛰어들기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먹고 살려면 돈도 벌어야 했다.

그는 한 시사주간지 기자로 정착의 첫발을 뗐고, 모 대북 방송 리포터 활동도 했다. 그런데 아무리 가명을 써도 어떻게 그의 신분을 알았는지 북한에서 협박 문자가 여러 번 날아왔다. 북에 남은 가족이 걱정돼 기자 일은 2006년까지 하다 그만두었다. 그의 목표는 연출이지 기자는 아니었다.

직장을 다니며 짬짬이 영화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공부를 하고 나니 ‘자본주의 제작 현장’을 경험해 보고 싶었다. 참관이 아닌 제작자로 일하고 싶었는데, 2004년 10월 지인의 도움으로 기회가 찾아왔다.

그는 북한 인권을 다룬 단편 독립영화 ‘너는 내 것이라’를 만들었다. 원작을 쓰고 제작까지 책임졌다. 낯선 전문 용어가 어려워 선배 감독들을 따라다니며 조언을 구하면서 제작팀을 꾸렸다.

꼬박 2개월 동안 첫 영화를 만들었다. 이때 얻은 경험이 이후 그가 제작자, 연출자, 극작가의 길을 걷는 데 용기를 북돋아 주는 밑천이 됐다. 영화를 만드는 데는 성공했지만, 돈을 벌 수는 없었다.

‘영화나 연극을 하려면 범의 굴에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2007년부터 대학로에 진출했다. 무명배우로 시작해 10년 넘게 작은 연극의 단역, 주연, 미니 드라마 단역 등 닥치는 대로 일했다. 주말이나 연휴엔 대형 트럭 운전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이어 갔다.

열심히 살다 보니 기회가 찾아왔다. 2012년 9월 김나윤 희원 극단 대표가 그를 찾아왔다. 그와 많은 얘기를 하며 재 보는 듯하더니 창작 뮤지컬 ‘언틸 더 데이’ 각색과 연출을 맡아 달라고 했다. 대본을 보니 수억 원이 투자되는 대형 상업 뮤지컬이었다.

오 씨는 뮤지컬 성공에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 뮤지컬은 그해 10월부터 12월까지 공연됐는데 매회 350석 객석이 가득 찼다.

뮤지컬 성공과 더불어 오 씨 이름이 언론과 방송에 조명되기 시작했다. 연출가로서 공식 데뷔를 한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선뜻 뮤지컬을 맡겨 준 김 대표에게 언제나 감사하며 살고 있다. 뮤지컬을 하면서 얻은 것도 많았지만 부족한 점도 많이 깨달았다.

‘한국에서 뮤지컬을 하려면 한국만의 정서를 익히고 전문 지식도 많이 필요하구나.’

전문적인 공부를 시작하려 했지만 어느덧 50세였다. 2014년, 고민 끝에 대학에 입학했다. 공연예술 학사 과정과 영상미디어학 석사 과정을 연이어 마쳤다.

한편으로 북한에서 왔다는 독특한 경력도 적극 활용했다. 2010년부터 그를 찾아와 북한말의 극적 화법을 배운 배우만 90명이 넘는다. 이들은 영화 드라마 뮤지컬 연극 등에서 활약하고 있는데, 스타도 여럿 있다. 2019년부터는 전국 말모이 연극제 이북 작품 예술감독으로 일하고 있다.

2012년 뮤지컬 제작을 성공시킨 오진하 감독이 취재진에게 포즈를 취하고 있다.


● 마지막까지 불태울 열정
오 씨는 한국에 도착해 20년 넘게 한 길만 달려왔다. 탈북할 때 품었던 연출의 꿈은 입국 10년 안에 이뤘고, 15년쯤 지났을 땐 기획과 제작 경영 그리고 극작도 겸할 수 있게 됐다. 이젠 영화, 연극, 뮤지컬은 물론 연주회나 방송 컨텐츠까지 기획하고 각본을 쓰며 연출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2020년 56세 늦은 나이에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그동안의 활동을 인정받아 새로 건립된 통일부 남북통합문화센터에서 문화콘텐츠 개발 확산 업무를 맡게 된 것이다. 처음엔 매년 연극, 뮤지컬, 단편 드라마를 한 편씩 만들 생각이었지만 지난해부터 욕심이 생겼다.

‘하나를 만들어도 국내 최고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자. 마지막을 불태우자’

지난해 60세가 되어 한국에 입국하던 39세 때의 열정으로 되돌아간 그가 만든 작품은 탈북민들의 한국 정착 과정을 담은 ‘열 번째 봄’이었다. 지가을엔 남북연합 음악회인 가을음악회 기획, 제작, 연출을 맡아 부산에서 공연했다.

올해도 연극 ‘백학’을 7월에 초연했다. 그가 대본을 쓰고 연출을 맡은 백학엔 그의 삶도 녹아 있다. 이달엔 경기 김포에서 가을음악회를 연다.

열정은 식지 않았지만 지나가는 세월은 야속하다. 올해 그는 61세가 됐다. 은퇴할 나이지만 여전히 문화콘텐츠를 개발하는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언제까지 일할지는 알 수 없다. 누군가 능력 있는 후배가 와서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이어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통일부 남북통합문화센터에서 일한 기간이 길진 않지만 아쉬움도 많다.

“제가 여기서 일하는 5년 동안 대통령이 세 번 바뀌었습니다. 남북통일 공감문화 관련 정책을 수행하는 사람으로서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많이 혼란스럽습니다.”

공무원 조직에서 일하는 예술가는 많은 제약을 받는다. 현실과 법의 충돌을 가장 피부로 느끼는 사람도 다름 아닌 그다.

한국 국민은 마음만 먹으면 유튜브나 인터넷으로 북한 대중음악을 얼마든지 접할 수 있다. 하지만 북한 콘텐츠를 상영하면 국가보안법에 위반된다. 북한 영화를 보여 주면서 북한 실상을 설명하고 싶지만, 이를 승인할 권한을 가진 공무원은 없다. 그렇다고 막는 사람도 없다. “네가 알아서 하고 책임도 져라”는 것이 공무원 사회 풍토다. 법을 위반하면 잡혀 가는 현실을 감내하고 영화를 상영할 순 없다.

연출가는 예술적으로 접근하고 싶은데, 이것이 행정규제와 부딪치면 이길 수 없다. 배가 산으로 가다 보니 현실과 동떨어진 결과물이 나올 때도 있다.

그가 남북통합문화센터에서 일한 5년은 극과 극을 오가는 대북정책 속에서 누구도 말해 주지 않는 해결책을 찾느라 진이 빠진 기간이기도 했다. 퇴직할 시간은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은퇴할 생각이 없다. 은퇴는 곧 죽음이다. 자판을 두드릴 힘이 남아 있는 한 계속 작품을 만들 생각이다. 전문 예술인이 되고 싶어 하는 탈북민을 키워 주고도 싶다.

“한국에 와서 20년 넘게 공연예술 계통에 몸을 담지 않았습니까. 배웠던 것들, 체험했던 경험 들을 다른 탈북민들에게 나눠 주고 싶습니다.”

그가 만든 연극에는 탈북민 연기자들이 늘 출연한다. 가수도 될 수 있으면 탈북 가수를 쓰려고 한다. 재능 있는 탈북민이 있다면 하나라도 더 기회를 주고 싶은 마음이다. 배우, 가수, 성악 등 2명씩 탈북민 예술가를 데뷔시키고 싶은 것이 지금 그의 목표다. 그는 역사 앞에 평가받는 심정으로 임한다.

“언제가 될 진 모르겠지만 통일이 된 뒤, 꿈을 찾아 따뜻한 남쪽 나라로 온 오진하가 이렇게 꿈의 흔적을 남기고 갔다고 기억됐으면 좋겠습니다.”

동아일보·남북하나재단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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