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골공원 바둑·장기판 사라진 날…노인들 허탈 “우린 애물단지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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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락금지 안내판이 세워진 탑골공원 북문. 김영호 기자 rladudgh2349@donga.com
바둑판이 사라진 탑골공원 북문 앞, 노인들의 손은 허공에서 맴돌았다. 매일같이 장기알을 튕기고 바둑돌을 쥐던 손끝은 갈 곳을 잃었고, 수십 년 쌓아온 인연도 함께 잘려나간 듯했다.

누군가는 멍하니 장기판이 놓여 있던 자리를 바라보다 허탈한 웃음을 지었고, 또 다른 이는 부채질만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가 큰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노인들의 푸념은 곧 소외감으로 번졌다. 사회가 자신들을 ‘애물단지’ 취급하는 것 같다는 씁쓸한 정서가 공원에 가득했다.

지난 7월 31일, 종로구청은 탑골공원 내에 오락행위 전면 금지 안내판을 설치했다. 안내판에는 “탑골공원은 3·1 독립정신이 깃든 국가유산 사적”이라며 바둑·장기 같은 오락은 물론 흡연·음주가무·상거래까지 모두 금지한다는 문구가 적혔다.

탑골공원 단속선 밖에서 장기판을 급조해 장기를 두고 있는 노인들. 김영호 기자 rladudgh2349@donga.com
탑골공원 단속선 밖에서 장기판을 급조해 장기를 두고 있는 노인들. 김영호 기자 rladudgh2349@donga.com
■ 왜 오락행위가 금지됐나?

탑골공원 북문과 동문에서 노인들이 바둑·장기를 두는 과정에 술판이 벌어지고 폭력이 오가며 경찰이 출동하는 일이 잦아졌다. 종로구청과 경찰은 결국 치안 유지를 이유로 지난 7월 말부터 공원 내 오락행위를 전면 금지한 것이다.

조치 시행 후 한달이 흐른 5일, 탑골공원의 풍경은 달라져 있었다.

구청이 설치한 노란 경계선 안에서는 장기판과 바둑판이 모두 치워졌다. 그 자리에 모였던 40~50명의 노인들은 팔각정이나 원각사비 앞에 앉아 대화만 나누거나 부채질로 더위를 달랠 뿐이었다. 일부는 공원 외곽에 임시 장기판을 펴거나, 종로구청이 대안으로 내놓은 서울노인복지센터 분관 바둑실과 인근 종묘광장공원으로 옮겨가 활동하고 있다.

종로구에서 운영하고 있는 사회복지센터 바둑, 장기실. 오후에는 항상 꽉찬다고 한다. 김영호 기자 rladudgh2349@donga.com
■ “복지센터 가세요”…시큰둥한 노인들

종로구청이 탑골공원 바둑판 대안으로 마련한 서울노인복지센터 분관 장기실에는 오전 시간에도 대부분의 좌석이 가득차 있었다. 시설을 이용하려면 개인정보를 적고 회원가입을 해야 한다. 공원에서 안내를 받고 온 노인들은 “귀찮다”며 불만을 표했다.

센터 홍보 담당자는 “탑골공원에서 오신 분들은 가입 절차를 꺼리는 경우가 많다”며 “한 달이 지났지만 신규 유입은 크지 않다. 이곳에서 장기를 두는 분들은 대부분 예전부터 오던 이용자”라고 전했다.

실제 탑골공원에서 바둑을 두다 복지센터로 옮겼다는 양모 씨(79)는 “야외에서 장기를 두던 우리가 하루아침에 ‘골칫덩이’가 된 것 같다”며 “정책에서 자꾸 밀려나는 느낌이라 서운하다”고 말했다.

바둑판이 있던 자리에는 노인들의 무료급식 줄이 대체했다. 김영호 기자 rladudgh2349@donga.com
바둑판이 있던 자리에는 노인들의 무료급식 줄이 대체했다. 김영호 기자 rladudgh2349@donga.com
■ 그래서 치안은 나아졌나?

종로구청 관계자는 “바둑판과 장기판을 치운 뒤 경찰 출동 건수가 줄어든 건 사실”이라면서도 “아침부터 술에 취해 눕거나 시비를 거는 주취자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고 말했다.

곽진규 서울종로경찰서 종로2가지구대 팀장도 “바둑·장기 자체로 사건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 문제는 주취자들이 끼어들어 폭행이나 소란으로 이어지는 경우”라며 “오락행위 금지로 치안 문제가 획기적으로 개선된 건 아니다”라고 했다.

종로구청 관계자가 길가에 누워서 잠을 청하고 있는 주취자들을 깨우고 있다. 김영호 기자 rladudgh2349@donga.com
실제 기자가 찾은 날에도 북문 인근 길바닥에는 술에 취해 드러누운 사람들이 있었고, 일부는 행인에게 시비를 걸다 구청 관계자들에게 제지당했다. 공원 내 장기판은 사라졌지만 고성방가와 음주는 여전했다.

치안을 이유로 바둑판은 치워졌지만, 그 자리에 남은 건 더 깊어진 노인들의 소외감과 외로움이었다.

■ “주취자와 바둑노인들 분리했어야”…노인들의 반발

20여년간 탑골공원에서 자주 장기를 뒀다는 김모 씨(80)는 오락행위 금지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그는 “3년 전만 해도 구청이 장기판을 제공하며 오락생활을 장려했는데, 이제 와 하루아침에 금지하니 황당하다”고 말했다.

그는 “보라매공원처럼 다른 공원은 장기·바둑을 위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단순히 오락을 막는다고 치안 문제가 풀리진 않을 것”이라며 “차라리 주취자들과 노인들을 분리 관리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탑골공원 팔각정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노인들. 김영호 기자 rladudgh2349@donga.com
탑골공원 팔각정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노인들. 김영호 기자 rladudgh2349@donga.com
■ 전문가 “노인 소외감 줄이는 대책 병행돼야”

최영민 백석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이번 조치를 “너무 앞선 정책”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치안을 위해 일정한 관리가 필요하다는 점은 이해하지만, 바둑·장기판 자체를 없애는 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라며 “마치 아이들이 장난감을 두고 다툰다고 장난감을 빼앗는 격”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요즘 노인들이 마땅한 소일거리도 없는 상황에서 그나마 탑골공원에서 즐길 수 있는 게 바둑과 장기인데, 이를 없애는 건 지나친 행정”이라며 “노인들이 공원에서 건전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대책이 마련돼야 소외감을 줄이고 치안도 안정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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