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개인사업을 하는 김진명 씨(가명)는 지난해 황망한 일을 겪었다. 가게 운영이 어려워져 대출을 받으려 알아보던 중 한 ‘공공기관’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자신을 정부기관 소속이라 소개한 직원은 곧바로 ‘낮은 금리에 돈을 빌릴 수 있다’며 진명 씨에 정책자금 신청을 권유했다. 대가로 컨설팅 수수료를 요구하는 것이 이상하긴 했으나 혼자 서류를 준비하기 어렵다는 생각에 계약금을 입금했으나 그 직후 연락이 끊겼다.
정책자금을 핑계로 과도한 수수료를 청구하거나 사기를 치는 ‘브로커’들이 소비 위축 장기화로 ‘역대급 한파’를 맞은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
과거에는 정책자금을 받을 수 있도록 서류를 작성해 주고 대출금의 5% 안팎을 떼어가던 수법이 주를 이뤘다면 최근에는 정책자금 상담을 대가로 보험계약을 요구하는 등의 형태로 수법이 다양화하고 있다.
10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정책자금 브로커로 인한 중소기업의 피해가 이어지고 있다.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의 정책자금 제3자 부당개입(브로커) 신고 현황에 따르면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적발된 불법 브로커 건수는 31건이다. 관련 건수는 2022년 3건에서 2023년 1건으로 줄었다가 지난해 4건으로 늘어났다.
유형별로는 정책자금 상담·알선을 대가로 보험계약을 요구하는 부당 보험영업 행위가 19건으로 가장 많았다. 이외 계약불이행 6건, 정부기관 사칭 4건, 대출심사 허위 대응 2건이다.
적발 건수는 중진공 정책자금 부당개입 신고센터에 접수된 것 중 일부라 실제 중소기업과 소상인의 피해는 더욱 클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4월까지 중진공 정책자금 부당개입 신고센터에 접수된 신고는 97건이다.
서울 중구 명동의 한 폐업한 상가 출입문에 대부업체 스티커가 붙어 있다. ⓒ News1
브로커 ‘수법 지능화’…보험설계사, 대부업체도 부당행위
현재 중기부는 제3자 부당개입을 ‘정책자금 신청업체에 재직하지 아니하면서 정책자금 신청·대출 과정에서 사업자의 피해를 유발하고 정책 목적을 훼손하는 행위’로 정의하고 있다.
대표적인 피해 사례가 컨설팅 업체가 성공 조건부 계약을 체결하고 수수료를 받은 뒤 도주하거나 대출에 실패했을 때도 선지급금을 반환하지 않는 경우다.
이 외에도 재무제표를 분식하거나 사업계획을 과대포장하는 등 허위로 신청 서류를 작성하고 수수료를 수령한 경우, 지원 자격이 안 되는 기업에 대출을 약속하고 대가를 요구하는 경우 등도 있다.
더욱이 최근에는 사기 양상이 다양화하고 수법이 지능화하고 있다.
과거 컨설팅 업체나 이를 사칭한 단체가 부당개입을 주도했다면 최근에는 보험설계사나 대부업체에서도 부당행위를 하고 있다. 또 정책 대상자들이 ‘성공 보장’, 무료 상담 등의 문구에 현혹돼 먼저 찾아갔다면 최근에는 조직적인 접근도 이뤄지고 있다.
중기부에 접수된 한 사례를 보면 공공기관을 사칭하는 브로커들도 등장했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A 씨는 공공기관으로 오인할 수 있는 명칭을 사용하는 컨설팅사로부터 정책자금을 저리로 지원받을 수 있다는 내용의 연락을 받았다. A 씨는 정부기관에 컨설팅사가 공공기관인지를 문의한 후에야 대출 대가로 수수료를 받는 브로커 업체임을 알 수 있었다.
업계에 따르면 일부 대부업체에서 정책자금 컨설팅사로 둔갑해 자사 대출을 권유하는 경우도 있다. 이외에도 보험설계사가 자신의 이름으로 보험 상품에 가입해 주면 무료로 정책자금 컨설팅을 제공하겠다고 권하는 사례도 있다. 보험 가입을 하고 나면 컨설팅을 해주지 않거나 컨설팅을 해주더라도 정책자금 대출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김성섭 차관이 6일 중기부에서 ‘정책금융기관 협의회’를 열고 브로커 근절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중기부 제공)
중기부, 경찰청-네이버 손잡고 ‘부당개입 근절’ 공조
이에 중소벤처기업부 등 정부도 최근 브로커 근절을 위해 직접 나섰다. 업계는 피해를 막기 위해 브로커 근절 대책을 추진하는 한편 정책자금 이용 편의성을 제고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중기부는 이달 6일 ‘중기부-정책금융기관 협의회’ 킥오프 회의를 개최하고 정책금융 제3자 부당개입(브로커) 근절 추진방안을 중점 논의했다.
중기부는 소관 법률 개정을 통해 제3자 부당개입 행위의 법적 정의를 신설하고 제3자 부당개입 행위에 대한 금지 의무의 명문화 검토를 우선 추진한다.
브로커 대응을 위한 대내외 협업도 확대‧강화한다. 적극적으로 브로커를 단속하기 위해 3월부터 경찰청과의 공조체계를 새롭게 구축한다. 정책금융기관이 자체 점검 후 경찰청에 일괄 수사 의뢰하면 경찰청은 전담수사팀을 구성하는 등 신속 수사하는 프로세스도 마련할 계획이다.
불법이 의심되는 브로커 포털광고 차단을 위해 포털사(네이버)와의 협업 체계도 본격 가동한다. 정책금융기관의 전담팀이 정부기관 사칭 등 불법이 의심되는 인터넷 광고를 네이버에 신고하면 네이버에서 이를 신속 검토해 시정 조치를 취한다.
자체 대응체계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신고센터 접수를 통한 브로커 적발 외에도 빅데이터 기반의 자체 브로커 적발 프로세스를 마련한다.
업계 관계자는 “요즘같이 어려울 때일수록 브로커들이 앞세우는 달콤한 광고 문구에 중소기업들이 현혹되기 쉽다”라며 “정책자금 신청이 어렵다는 인식을 없애고 실제로 어려워하는 부분들에 대해서는 절차 간소화 등 편의성과 접근성을 제고하는 것도 필요하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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