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점식 천지세무법인 회장이 자신의 책 ‘어머니, 나의 어머니’를 놓고 감사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첫째, 어머니가 살아계셔서 감사합니다. 둘째, 제가 어머니 아들인 것에 감사합니다. 셋째, 정신이 혼미한 지금도 ‘제가 누구냐’고 물으면 ‘내 아들’이라고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점식 천지세무법인 회장(70)이 2010년 인지장애(치매) 판정을 받은 어머니 장곤단 여사(2011년 86세로 작고)를 생각하며 써내려 간 1000개의 감사편지 앞부분이다.
어머니는 이 편지를 630여 통 썼을 때 돌아가셨다. 박회장은 상을 치른 뒤에도 370여 통을 더 써서 1000개의 감사편지를 완성했다.
‘어머니, 내 어머니’
누구에게나 어머니는 특별한 존재지만 박 회장에게는 더욱 그랬다. 어머니는 20대의 꽃다운 나이에 유복자인 5살 아들을 데리고 흑산도로 들어가 남의 집 일을 해주며 키웠고 뭍으로 유학보내 고등학교를 졸업시켰다.
“섬에서 유일하게 남의 집 셋방살이를 했어요. 참 어렵게 살았는데, 제 마음 속에는 그런 그늘이 하나도 생기지 않았어요. 어머니가 워낙 저를 신뢰하고 자신감을 갖도록 키워주신 덕입니다. 예를 들어 끼니때면 저는 어머니가 일하러 간 집에 가서 밥을 먹었는데 ‘얻어먹는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손님처럼 가서 먹고 온다는 느낌이었죠.”
섬 마을 인심이 후했던 것에 더해 그가 공부를 무척 잘했다는 점, 어머니에 대한 평판이 워낙 좋았던 점이 작동했던 듯했다.
그는 이 편지들을 모아 2014년 ‘어머니, 부치지 못한 1000통의 감사편지(올림)’이란 책으로 만들었고 2022년 개정판 ‘어머니, 내 어머니(올림)’를 냈다.
어머니와 함께 고구마를 먹는 박점식씨. 박 씨 오른쪽 발쪽에 귀여워하던 강아지도 보인다. 박점식 씨 제공
어머니, 내 어머니 표지. 박씨는 책 인세는 모두 기부하기로 했는데 생각만큼 많은 기부를 하지 못해 죄송하다고 말한다.
50대 중반에 ‘감사’를 만난 축복
그는 세무업계에서 ‘감사운동 전도사’로 불린다. 지난달 25일 서울시 금천구 가산디지털단지 내에 자리한 천지세무법인 사무실을 찾았다. 사무실 입구 벽면에는 ‘감사 메모’가 잔뜩 꽂힌 나무가 장식돼 있었다. ‘00님. 야근당직 짝꿍 해줘서 고마워요’ ‘00팀장님 칭찬합니다’ 등 직원들이 붙인 일상의 소소한 감사들이 깨알같이 적혀 있다.
천지세무법인 사무실 입구에 장식된 감사의 나무를 배경으로 선 박점식 회장. 직원들의 감사가 담긴 사연들이 빼곡히 꽂혀 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감사운동을 하게 된 계기는.
“2000년대 후반 회사가 위기라고 느꼈습니다. 당시 세무업계는 전자세금계산서 도입을 앞두고 업무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할 상황이었어요. 답답하던 차에 우연히 뇌과학자와 심리학자가 쓴 논문을 읽었는데 ‘이거다’ 싶더군요. ‘감사편지를 하루 5개씩 쓰면 3주면 스스로의 변화를 느끼게 되고 3개월이면 다른 사람들이 내 변화를 감지하게 된다’는 얘기였습니다. 나부터 달라져보자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감사편지 쓰기’는 그의 50 평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일대 사건이 돼 버렸다. 가장 많이 변한 것은 박 회장 자신이었다.
“전에는 제가 성격이 만만치 않아서 직원들에게는 부담스러운 윗사람이었을 거예요. 하지만 감사일기를 쓰면서 미소도 늘고 ‘사람이 달라졌다’는 소리도 많이 들었습니다.”
석 달 뒤 그는 감사편지 쓰기를 전 직원에게 확대했다. 종이세금계산서 입력센터를 만들어 기존 업무를 줄이고 남는 시간을 고객 상담에 집중하도록 했다. 사무실도 서초동에서 지금의 장소로 옮기고 스마트오피스로 바꿨다. 직원들이 고객에게도 감사편지를 쓰게 되면서 회사는 더욱 성장세를 이어갔다.
“15년째 매일 감사편지를 일기처럼 쓰고 있습니다. 하루 10개 이상은 씁니다. 그날 일어난 인상적인 일이나 상황을 적고 마지막에 감사합니다! 라고. 안 좋은 일이 있어도 더 나쁜 일을 당하지 않아서 감사하다고 씁니다.”
1990년 박점식 씨의 첫 사무실 개소식에 온가족이 출동했다. 가운데 어머니도 보인다. 박점식 씨 제공
호랑이 어머니
돌이켜보면 어머니는 아들이 ‘아비없는 자식’ 소리 들을세라 더 엄하게 키웠다. 초등학교 때까지는 매를 많이 맞았지만 중학교에 들어가니 더 이상 매를 들지 않았다.
“고등학교 가기는 글렀다는 생각에 친구들과 어울리며 술 담배에 손을 댔습니다. 어머니는 눈치를 채셨을 텐데도 아무 내색도 없으셨어요. 그러다가 중학교 3학년이 되자 앉혀놓고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가 너를 고등학교에 보낼 테니 공부하라’고 하셨죠. 매 맞는 것보다 열배는 더 아팠습니다.”
목포상고 다니던 시절 크게 혼난 적이 있다. 방학 때 친구들과 짜고 이웃집 염소를 몰래 잡아먹고 목포로 돌아갔다. 어머니는 이웃의 염소값을 물어주고 목포 자취집까지 그를 찾아와서 교과서와 책을 전부 꺼내 불사르며 꾸짖었다.
“내가 ‘경우 바르게’ 살라고 했냐, 안 했냐? 사람이 그런 나쁜 짓을 하면서 공부는 해서 뭐하냐. 남에게 못된 짓 하는 사람은 공부를 해선 안된다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제가 감사일기를 안 썼으면 그런 일도 다 잊고 살았을 거예요.”
졸업 뒤 무작정 상경해 공장과 백화점 등을 전전하며 일했다. 주경야독 끝에 1980년 세무사 시험에 합격한 것이 속세의 기준으로는 삶의 전기였다.
“남들에게 잘해라. 베풀면서 살아라”
‘어머니, 나의 어머니’를 읽어보면 짤막한 에피소드가 쌓여 어머니의 전체 모습이 그려지고 그 희생과 인내, 깊은 속내가 읽힌다.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너는 혼자니까 남에게 잘해라, 남에게 베풀며 살라’고 가르쳤다. 그는 ‘가진 것도 없이 뭘 베푸나’라고 생각했지만 사업이 궤도에 오르자 제일 먼저 그 생각이 났다고 한다. 흑산도 초등학교 교장선생님께 전화 걸어 ‘혹시 학교에 필요한 건 없느냐’를 묻고 교문 고치는 비용을 보내거나 아내가 다니는 성당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 없느냐를 탐문했다.
“누가 어디에 기부했다는 소식 들으면 제 가슴이 덩달아 뛰었어요, 나도 저거 해야 하는데, 어디다 하지? 이러면서.”
그렇게 그는 기부천사가 돼 갔다. 그는 사랑의 열매 아너소사이어티 18호 회원이고 푸르메재단의 열성적인 후원자이기도 하다. 정기후원은 물론, 2011년 어머니 장례식 조의금 5000만 원을 기부했고 2014년 푸르메재단 고액후원자 모임 ‘더 미라클스’가 발족하자 1호 회원이 되었다. 정기후원하는 단체만 10여 군데가 넘고 클래식과 국악에 관심을 넓히면서 첼리스트 문태국 바리톤 김기훈을 지원하기도 했다.
2014년 푸르메재단이 고액기부자 모임 ‘더 미라클스’를 발족했다. 왼쪽부터 션, 이철재씨, 정혜영씨, 박동훈 씨, 박점식 회장, 강지원 재단 이사장. 박점식 씨 제공
마음이 씩씩한 아들, “더 오래 내 곁에”
1985년생인 아들 동훈 씨는 근위축증의 일종인 듀센 근이영양증을 앓고 있다. 근육의 힘이 빠지고 위축되며 악화되는 병이다. 두 살도 되기 전에 진단을 받았고 모두가 20세를 넘기기 어렵다고 했다. 자꾸만 넘어지던 아이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휠체어에 의지했다. 하지만 온 식구의 헌신적인 돌봄 덕일까. 만 40세인 지금도 꿋꿋하게 지내고 있다.
“지금은 손가락끝과 고개 정도만 움직일 수 있어요. 올 초 중환자실에 입원했을 때는 이제 각오해야 하나 생각했습니다. 친척들이 마지막 인사까지 하러 왔었지요. 얼마 전 퇴원했고 주 3회 투석을 다닙니다. 밤에만 쓰던 산소마스크를 낮에도 급히 써야 하는 경우가 늘었어요.”
동훈 씨의 건강이 악화되기 전에는 온 가족이 해외여행에 나서기도 했다. 호주의 한 해변에서. 박점식 씨 제공―아드님이 힘들어하지는 않는지.
“그 녀석의 긍정성은 놀라울 정도예요. 제게 ‘아버지, 내 제삿밥 얻어먹으려면 잘하세요’라고 하는 식이죠. 중환자실에 누워 뼈만 남은 모습에 엄마가 막 우니까 ‘엄마, 맥도널드에 츄러스 신제품 나온다는데 나 그거 먹고 싶어. 안 죽으니까 걱정마’라고 했다나…. 하하. 그저 더 오래 우리 곁에 머물러주기를 바랄 뿐이고 그동안은 우리도 붙어서 최선을 다해야죠.”
동훈씨는 10여 년 전 천지세무법인 직원이 됐다. 의사들이 ‘스무살까지도 못 살 것’이라던 아들이 20대 후반에 접어든 어느날, 박회장은 ‘하루를 살더라도 주체적인 삶을 살도록 해주는 게 맞겠다’ 싶어 동훈 씨에게 일을 시켰다. 집에서 컴퓨터로 회사 홈페이지 관리를 하게 한 것.
동훈 씨가 신나게 일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어느날 회사에 놀러가보고 싶다고 하더니 주 3일만 출근하겠다고 말해왔다. 그 뒤 코로나 사태 전까지는 거의 매일 출근했다. 직원들에게 커피를 잘 쏘곤 해 인기도 좋았다. 박 회장은 자기 일을 하는 주체적 경험이 아들의 건강을 지켜준 힘이 됐다고 믿고 있다.
천지세무법인 사무실에서의 아버지와 아들. 동훈 씨는 회사에 나와 일하는 것을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박점식 씨 제공
자수성가해 직원 100여 명이 넘는 세무법인을 키워냈으니 사회적으로 성공한 셈이다. 하지만 그는 요즘 스스로에 대한 반성으로 혼란스럽다고 말한다.
“나이 일흔이 되어서야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제 스스로는 ‘이 정도면 괜찮은 남편, 괜찮은 아버지’라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그게 저혼자 착각이었다는 의구심이 드는 거죠. 어쩌면 제가 어머니의 깊고도 끈질긴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 오만해진 건 아닐까. 아내와 아들 딸이 어머니처럼 무조건 저를 믿고 품어줄 수는 없는데,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채워주지 못한 그 무엇이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박회장이 사업이 바빠 밖으로 도는 사이 부인은 매일 아들을 업어 등하교시킨 후유증으로 앙쪽 무릎 연골이 다 망가졌다. 외아들만 바라보고 살아온 시어머니를 모시고 장애를 가진 아들을 돌보며 가정을 꾸려야 하는 부인의 어려움도 대충 모른 체했다.
물론 그는 이런 부인과, 몸이 아픈 오빠 때문에 늘 모든 것을 양보했던 딸에게도 100통의 감사편지를 썼다.
-부인이 정말 평생 고생하셨을 것 같습니다.
“제가 그걸 잘 몰랐다니까요. 이제 깨닫기 시작하니 집사람 얼굴에 조금씩 웃음기가 돌기 시작했어요. 반성문을 수없이 썼어요. 그러니까 저는 정말로 뭘 잘못하는지를 몰라서 깨닫지를 못했어요. 이 정도면 됐겠지 싶었는데 아닌 거예요. 스스로 얼마나 한심한지. 감사에 대해 강의하고 다닌 게 부끄럽습니다. 정작 중요한 게 뭔지도 모르고 가장 소중한 사람한테 상처를 주고….”
그래서 은퇴 이후 계획을 묻자 단호한 답변이 돌아온다.
“집사람이 하자는 대로 하려고 합니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방향으로 의사결정을 하려구요. 당분간 제 생각은 접어두기로 했어요.”
그는 한때 사진촬영에 취미를 붙여 혼자 이곳저곳 촬영을 다니곤 했다. 이 취미는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소강상태가 됐다고. 박점식 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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