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세상과 소통하는 법 가르쳐요”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4월 14일 16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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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각장애인 조현상씨

“현재 시간을 알고 싶다면 제가 손가락을 대고 있는 버튼을 한 번 눌러보시겠어요?”

11일 서울 종로구 실로암 시청각장애인 학습지원센터. 시청각장애인 조현상 씨(33)가 같은 장애가 있는 김모 씨에게 보조기기 ‘한소네’ 사용법을 설명했다.

김 씨가 버튼을 몇 번 누르자 “오후 2시 46분 15초입니다”라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잘하셨어요.” 조 씨가 박수를 쳤고 김 씨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조 씨는 이곳에서 특별한 직원이다. 시각과 청각 장애가 있는 시청각장애인이면서 같은 장애인에게 보조기기 사용법 등을 알려주는 강사다. 시청각 장애는 장애 정도에 따라 저시력 난청, 전맹(全盲) 난청, 저시력 전농(全聾), 전맹 전농으로 구분된다. 조 씨는 앞을 전혀 볼 수 없고 조용한 공간에서 큰 소리만 들을 수 있어 ‘전맹 난청’에 해당한다.

11일 서울 종로구 실로암 시청각장애인 학습지원센터에서 시청각장애인 조현상 씨가 같은 장애가 있는 김모 씨에게 보조기기 사용법을 설명하고 있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 “강사 일 하며 나도 사회의 구성원임을 느껴”
조 씨는 고2 때 망막질환 진단을 받은 뒤 시력을 잃었다. 20대 후반부터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난청이 진행됐다. 시각과 청력을 모두 잃고 그는 세상과 단절된 듯한 고립감을 느꼈다.

“가족이나 친구들과 같은 공간에 있어도 대화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았어요. 몸은 함께 있어도 마음은 혼자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2021년부터 센터 강사를 하면서 삶이 바뀌기 시작했다. 다른 장애인에게 보조기기 사용법을 알려줬고 그들이 세상과 소통하고 타인과 어울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변화된 모습을 보는 건 조 씨의 기쁨이자 보람이다. 조 씨는 “이 일을 하면서 사회 속에서 ‘내 역할’이 뚜렷해진다고 느낀다”며 “나 역시 사회 구성원이라는 걸 실감하게 됐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가족 곁을 떠나 독립했다. 걱정이 많았지만, 막상 혼자 살아보니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식사 준비나 설거지도 혼자 거뜬히 해낸다. 새로운 취미활동이나 운동에도 도전해 볼 생각이다.

보조기기 ‘한소네’를 사용하는 조현상 씨와 시청각장애인 김모 씨 모습. 이 보조기기는 점자와 음성을 상호 변환해 준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자유로운 소통을 돕는 기기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복지 서비스, 해외보다 30년 뒤처져
조 씨 같은 시청각장애인은 국내 약 1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창진 센터 팀장은 “시청각장애인은 의사소통 방법을 익힐 때 일대일 교육이 필수인데, 대부분 장애인 복지관은 일대다 방식으로 운영돼 교육받기가 어렵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시청각장애인의 의사소통 방식은 시각 또는 청각 중 하나의 장애만 있는 경우와는 다르다.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촉수어’다. 촉수어는 촉각으로 느끼는 수어다. 상대가 손으로 수화를 하면, 시청각장애인은 그 손 모양을 손으로 만져가면서 내용을 이해한다.

촉수어로 소통하는 모습. 실로암 시청각장애인 학습지원센터 유튜브 캡처.

또 다른 의사소통 방식으로는 ‘손가락 점자’도 있다. 손에 점자 모양을 찍어 촉각으로 느끼는 점자다.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를 점자의 점 위치에 따라 누르는 방식으로 단어를 전달하는 것이다.

손가락 점자로 소통하는 모습. 실로암 시청각장애인 학습지원센터 유튜브 캡처.

이 팀장은 “일본 등 해외에서는 30~40년 전부터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복지 서비스가 시작됐지만 국내에서는 불과 5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며 “더 많은 관심과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인터뷰 말미에 조 씨는 다른 시청각장애인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누군가 내게 손을 내밀었을 때 그 손을 잡는다는 게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저도 잘 알아요. ‘도움을 받았는데도 내가 못하면 어쩌지’라는 생각, 저도 많이 했거든요.”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는 사람을 떠올려보세요. 위에서 보면 제자리를 맴도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한 걸음씩 올라가고 있습니다. 시청각장애인도 배움에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지만 자신을 믿고 조금씩 용기를 냈으면 좋겠습니다.”

#시청각장애인#보조기기#의사소통#손가락 점자#복지 서비스#사회 구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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