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아직 젊다’는 그 믿음이 건강을 부릅니다”… 삶과 죽음 연구하는 의사의 ‘건강하게 나이들기’[서영아의 100세 카페]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4월 26일 01시 40분


윤영호 서울대 건강문화사업단장/ 의대 교수

연명의료결정법 법제화됐지만
존엄한 마무리 위한 지원 아쉬워
의사의 사명은 ‘병’ 아닌 ‘사람’ 치료
죽음을 통해 보면 진짜 삶이 보여
이타적 삶, 좋은 관계가 건강 불러

‘나는 죽음을 이야기하는 의사입니다(2012년)’, ‘나는 한국에서 죽기 싫다(2014년)’, ‘나는 품위 있게 죽고 싶다(2021년)’… 그 연배에 이처럼 죽음에 대한 책을 많이 낸 현직의사도 드물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는 첫 저서의 제목대로 ‘죽음을 이야기하는 의사’였다.

호스피스·완화의료 전문가이자 굵직한 의료정책들을 내놓으며 세상을 바꿔온 윤영호 서울대 의대 교수(61) 얘기다.

최근 새 저서를 보내온 그를 만나려 15일 서울대 의대를 찾았다. 대뜸 그는 “내 나이는 43세 정도”라고 말한다. 그가 적정나이를 계산하는 방법은 이렇다. 자신이 태어난 1964년의 기대수명이 58세였고 현재 기대수명이 83세이므로 58을 83으로 나눈 0.7을 곱해야 현재의 적정나이가 된다는 것. 61세에 0.7을 곱하면 43세 정도 된다.

죽음을 통해 삶을 탐구해온 윤영호 서울대 교수가 연구실에서 건강한 노년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0대 누님 암으로 보내며 의사의 길 결심
그가 의사가 된 동기에는 개인적 체험이 자리하고 있다. 어린 시절 큰 누나가 24세 꽃다운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중학교 1학년 때, 제가 맹장수술을 받게 돼 큰누나가 간병을 해줬어요. 회진하던 의사가 누나 눈에 황달이 보인다며 검사를 권했는데, 알고보니 위암이 간까지 전이돼 이미 손 쓸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대학생이던 큰 형과 아버지가 크게 싸웠다. 형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 하니 수술을 해보자고 했고, 6남매를 키워야 했던 아버지는 포기하려 했다. 누나는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음을 맞이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며 소년은 반드시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삶은 한번 방향이 잡히면 자꾸 그쪽으로 끌려 들어간다. 서울대 의대에 진학한 그는 1989년 원목실 봉사활동을 통해 말기 위암 환자를 만났다. 환자 가족들과 함께 간병하고 임종까지 지키면서 호스피스에 대한 사명감을 갖게 됐다. 25세 때였다.

“신부님 수녀님들과 함께 말기 환자들의 얘기를 들어주고 기도해주고 책을 읽어주는 일을 했습니다. 그게 ‘호스피스’였다는 걸 나중에 알았지요.”

2011년 EBS다큐 ‘명의’에 호스피스 완화의료 전문의사로 그가 출연하기도 했다. 이 내용을 책으로 쓴 것이 첫 저서 ‘나는 죽음을 이야기하는 의사입니다’가 됐다.

1990년 서울대 학사 졸업식날 가족들과. 학사모를 쓴 윤 교수 좌우에 부모님이 서 있다. 윤영호 교수 제공

대학시절 의대 간호대 연합가톨릭 동아리 CaSA에 소속돼 진료봉사를 다녔다. 사진은 경북쪽으로 여름 진료봉사를 갔을 때 찍은 것이다. 이중 한분이 1989년 원목실에서 만난 말기 암 환자의 주치의가 됐다고 윤교수는 회고했다. 윤영호 교수 제공

―가정의학과를 선택한 이유도 호스피스를 하기 위해서라고요.

“전공과를 정하기 전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조언을 들었습니다. 심지어 가톨릭단체에 호스피스병원을 만들자는 제안도 했었지요. 선배들은 가정의학과를 권했습니다. 그런데 과 입국식때 제가 ‘호스피스를 하려고 들어왔다’고 했더니 다들 웃더군요. 당시 호스피스는 성직자나 간호사가 하는 일이라는 인식이 강했어요.”

무의미한 연명 중단하도록…연명의료결정법 통과시켜
따지고보면 우리 모두는 그에게 신세를 졌다. 2016년 제정(2018년부터 시행)된 ‘연명의료결정법(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 법제화는 그의 노력에 힘 입은 바 크다.

한국인의 삶의 마지막에 대한 생각도 엄청나게 바뀌었다. 사전에 ‘무의미한 연명의료를 받지 않겠다’고 서약하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등록한 사람은 23일 현재 283만 여명. 연명의료 중단을 이행에 옮긴 사람은 누적 42만 여 명에 이른다.

2015년 10월 국회에서 개최된 호스피스 완화의료 및 연명의료 대토론회에서 사회를 보는 윤 교수. 당시 원혜영 의원이 이끄는 ‘웰다잉문화조성을 위한 국회의원 모임’과 윤영호 교수가 이끄는 ‘호스피스 완화의료 국민본부’가 공동주최했다. 윤영호 교수 제공

―2017년 경 일본의 슈카쓰(終㓉‧인생의 마무리를 준비하는 활동)를 취재할 때 그쪽 사람이 “한국은 어느 날 갑자기 법을 뚝딱하고 만들어 버렸다”며 혀를 내두르더군요.

“그때 일본 언론이 제게도 취재하러 왔었어요. 일본에서도 오래 전부터 추진했지만 계속 안 됐는데 어떻게 한 거냐고요. 이유는 여럿 있지만 일단 계기가 되는 사건이 있었죠. 1997년 보라매병원 사건에 이어 2008년 김할머니 사건이 결정적이었습니다.”

김할머니는 2008년 2월 식물인간이 되었으나 인공호흡기로 연명하다가 자녀들이 연명의료의 중단을 요구하며(영양제공 중단은 요구하지 않았다) 재판 끝에 2009년 5월 21일 대법원에서 승소한 사건이다.

당시 대법원은 연명의료는 무의미한 신체침해 행위로 오히려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해하는 것이며, 회복 불가능한 사망 단계에 이른 환자가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에 기초하여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인정될 경우 연명의료 중단을 허용할 수 있다고 판결했다. 사실상 존엄사를 인정한 첫 판례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 뒤로 국회에서도 계속 법안을 논의해왔습니다. 당시 정부는 연명의료결정법만 통과시키려 했어요. 저희가 호스피스 법안을 함께 넣어야 한다고 브레이크를 걸었습니다. 연명의료를 중단했는데 호스피스 지원이 없다면 생의 마지막을 향해가는 분들이 너무 힘들지 않겠어요. 우여곡절 끝에 따로따로 발의된 두 법안을 합쳐서 통과시킨 겁니다.”

이때 기여한 공로로 그는 2016년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연구실에서 인터뷰에 응하는 중인 윤 교수. 책꽂이에는 인문서적이나 사회과학서적 등 ‘문과성’ 책이 더 많이 보인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재원 없는 정책은 모래위에 지은 성 같아”
천신만고 끝에 법이 제정됐지만 윤교수는 못내 찜찜하다. 법안이 19대 국회 말기에 급하게 통과되면서 그가 넣었던 웰다잉과 호스피스를 위한 ‘기금’과 그것을 운영할 ‘재단’ 조항이 모두 삭제됐기 때문이다.

“‘이건 이번엔 빼고 다음에 하자’면서 통과에 집중했는데 지금까지도 그대로입니다. 아무리 법안이나 정책을 만들어도 재원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기금과 재단이 왜 필요한 겁니까.

“지금의 연명의료결정법은 연명의료 중단에 국한돼 있기 때문에 아주 소극적입니다. 연명의료 중단을 결정하는 분들에게 웰다잉을 위한, 존엄한 죽음을 준비시켜 드려야 해요. 생전장례식이나 마지막 소원, 마지막 여행, 자서전 등 인생노트, 이런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남기고 죽음을 잘 정리할 시간을 갖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걸 제도화하자고 계속 부르짖었지만 정부도 의료계도 귀담아듣지 않네요.”

국가가 그런 데까지 신경쓸 여력이 있을까. 아무튼 윤교수의 논리는 이렇다. 예컨대 누군가가 ‘나는 연명의료 안하겠다’ ‘호스피스를 하겠다’고 결정한다면 건강보험에서는 엄청난 의료비가 절감된다. 대신 이 분의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해줘야 한다는 것.

“이런 건 정부가 나서서 해야 합니다. ‘아름다운 마무리, 국가가 책임집니다’라고요.

미국은 카터 대통령때부터 오바마 대통령때까지 매년 11월을 ‘호스피스의 달’로 정하고 대통령이 말기 환자와 그 가족을 위로하고 그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고 격려하는 메시지를 씁니다. 캐나다는 의회가 나서서 ‘모든 국민의 권리에 대한 선언’에 존엄성을 지키며 자신의 삶을 선택할 권리를 포함했어요.”

서울대병원에서 가진 암환자 파트너십 워크숍에서 사회를 보는 윤 교수. 암이 완치된 사람과 암환자를 연결해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윤영호 교수 제공


‘설탕세’에 거는 기대
그래서 그가 요즘 열심히 들여다보는 것은 ‘설탕세’다. 몸에 해로운 상품 판매에 대해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그 사용을 줄이고 모자라는 재원으로도 활용한다는 취지다. 유사한 사례로 담뱃세가 있는데 현재 1갑당 세금이 약 3300원, 연간 11~12조 원이 걷힌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16년 ‘설탕을 넣은 상품값의 20%만큼 세금을 매기라’고 각국에 공식권고했다. 이를 계기로 설탕세를 도입하는 곳이 급증해 세계은행에 따르면 2000년 17개국에서 2023년 117개 국가 및 지역으로 늘었다.

“영국이 2018년에 설탕세를 시작했는데 설탕 섭취량이 줄어든 것은 물론이고 비만, 암 발병까지 줄었어요. 최근 청소년 천식이 줄었다는 논문도 나왔습니다.

제가 새로운 재원으로 설탕세(건강세)를 도입하는 것에 대해 국내에서 여론조사를 두 번 했어요. 초고령사회 노인건강 문제나 예방적 의료에 대한 재원 확보를 위해 건강보험료를 올리는 것과 건강세를 신설하는 것에 대해 물으면 80% 이상이 건강세를 택했습니다. 사실 호스피스도 그렇지만 고령인구 증가에 따른 만성질환 치료와 예방 활동에도 재원이 필요합니다.”

2018년 12월 열린 웰다잉시민운동 창립총회. 윤영호 교수 제공
웰다잉시민운동 창립총회에서 윤교수가 경과보고를 하고 있다. 윤영호 교수 제공


고독은 건강에 치명적
그가 최근 낸 저서 ‘삶의 의미를 잃기 전에(안타레스)’에서는 삶과 죽음에 관한 얘기 외에 ‘건강하게 나이드는 법’이 수록돼 있다.

“이 책은 제 참회록과 같은 것입니다. 건강과 삶에 대한 신념이 담겨 있어요. 미래를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건강권, 건강민주화, 건강공동체, 건강세 등을 고민합니다. 세상은 생명공동체, 삶 공동체, 건강공동체를 거쳐 돌봄공동체, 웰다잉공동체로 나아가야 합니다.”

건강하게 나이드는법 파트에는 △건강은 선택에 의해 얻어내는 것 △삶의 목표와 보람이 수명을 늘린다 △고독은 건강을 망친다 △사회적 관계가 건강에 중요하다 △‘아직 젊다’는 믿음이 기적을 곧잘 낳는다 △나이 들수록 돕고 살아야 하는 이유 등이 담겨 있다.

“건강하게 나이 들려면 삶의 목표랄까 보람이 있어야 하고 고독을 벗어나야 하고 낙관주의를 가져야 하고 ‘아직 젊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과거보다 기대수명이 늘어났으니 그에 어울리는 젊은 생각을 해야 하죠. 그런 노력을 체계적으로 해야 한다는 겁니다.”

2022년 ‘존엄한 죽음에 역행하는 위헌적 법률 개정 정책제언’을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출했다. 제언에는 의사 조력 사망에 대한 입법화 정책을 개발해 국회와 정부에 제안해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윤영호 교수 제공


이타적인 활동이 수명을 늘린다

―노년에 사회관계가 좋을수록 건강하다고요.

“고독은 건강에 치명적입니다. 고독의 해악에 대해 영국에서는 하루에 담배 15가치를 피우는 것과 비슷한 정도로 해롭다고 하고 있습니다. 나이 들수록 좋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교류하고 사는 삶이 건강의 비결입니다.”

―부자일수록 오래 살고 건강하다는 말이 있지요

“그래서 건강 민주화쪽으로 방향을 틀어야 합니다. 건강불평등을 해결할 수 있는 재원을 만들고 그 재원을 사용하는 국민은 권리만이 아니라 책임도 져야 합니다. 예컨대 노인들이 젊은 세대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 건강이예요. 자신의 건강을 잘 관리함으로써 의료비를 줄이고 젊을 사람들을 위해서 봉사활동을 할 수도 있지요. 재미있는 건 봉사활동이 생존율을 20% 정도 올린다는 점입니다.”

―노년의 봉사활동을 강조하시는군요.

“심리학자 메슬로의 이론에 따르면 인간의 욕구는 첫째 생존, 둘째 안정, 셋째 소속, 넷째 인정, 다섯째 자아실현의 순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가 자아초월이예요. 이게 바로 봉사하는 마음입니다. 나를 넘어서 이타적으로 사는 삶이 나를 더욱 건강하게 만든다는 거죠.

여기에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것, 사회관계를 잘 만들어가는 이런 것들이 합쳐져서 인간의 삶이 됩니다. 인간은 동물로 태어나 신이 되고자 하는 존재죠. 불가능하지만 끊임없이 도전하므로 위대합니다.”

혼자 꾸는 꿈은 그저 꿈이지만 여럿이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고 했던가. 그의 꿈이 확산돼 현실이 되길 빌어본다.

윤교수는 평생 죽음을 통해 바람직한 삶을 탐구해왔다. 요즘은 노년의 마음과 몸을 위한 예방의학 쪽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러시아 여행 중 짬을 내어 찾은 톨스토이의 무덤 앞에서.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고인의 뜻에 따라 아무런 비석도 표식도 없이 길옆에 무덤만 덩그러니 있는 모습에 경이를 느꼈다고. 윤영호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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