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장기적 울분’ 상태가 악화됐다는 분석이 나왔다. 장기적 울분은 만성적인 무력감이나 비관을 의미한다. 사회 전반적인 정신건강 수준도 ‘좋지 않다’는 응답이 절반 가량을 차지했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연구팀은 지난달 18세 이상 성인 남녀 1500명을 온라인 조사한 ‘정신건강 증진과 위기 대비를 위한 조사’ 결과를 7일 공개했다. 연구팀이 자가측정 도구로 주요 감정과 정서 상태를 5점 만점으로 측정한 결과 응답자들의 12.8%는 ‘높은 수준의 심각한 울분’(2.5점 이상)을 겪고 있었으며 이들을 포함한 54.9%는 울분의 고통이 지속되는 ‘장기적 울분 상태’(1.6점 이상)로 나타났다. 지난해 9월 시행된 조사에서 응답자의 49.2%가 장기적 울분 상태에 놓여있다고 응답한 것보다 약 5%포인트 상승한 수치다.
심각한 울분을 느낀다고 응답한 비율도 늘었다. 심각한 울분 비율은 지난해 9.3%에서 12.8%로 상승했다. 연령별로는 30대에서 17.4%로 가장 두드러졌다. 월 소득이 200만 원 미만 집단에서 21.1%인 반면, 월 소득 1천만 원 이상 집단에서는 5.4%로 차이가 크게 났다.
울분은 정의나 공정함 등 세상의 기본 바탕이라 여기는 믿음이 위배되는 스트레스 상황에 처할 때 그에 대한 반응으로 발생하는 감정이다.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전망에 비관하거나 무력감이 깊다는 점, 스트레스 유발 문제의 원인과 이유를 외부에서 찾는다는 점 등에서 분노와 우울과는 차별점이 있다.
이번 조사에서는 공정에 대한 인식도 부정적으로 나타났다. ‘기본적으로 세상은 공정하다고 생각한다’는 명제에 10명 중 7명(69.5%)이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연구팀 관계자는 “세상이 공정하다는 신념이 높아질수록 울분 점수가 낮아지는 유의미한 관계를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울분을 느끼게 하는 정치·사회 사안에서는 ‘정부의 비리와 잘못 은폐’, ‘정치·정당의 부도덕과 부패’가 1, 2위를 차지했다. 지난해 조사에서는 ‘언론의 침묵·왜곡·편파보도’, ‘정치·정당의 부도덕과 부패’가 각각 1,2위를 차지한 것과 달라진 부분이다. 올해 1위를 차지한 정부의 비리와 잘못 은폐 사안은 지난해 조사 때 3위를 기록한 답이었다.
사회의 전반적인 정신건강 수준을 묻자 평균 점수는 보통(3점)보다 낮은 2.59점(5점 만점)에 그쳤다. ‘좋지 않음’이란 평가가 48.1%로 절반에 육박했는데, ‘좋음’(11.4%)의 4배 이상 수치였다. 여기에는 경쟁과 성과를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꼽혔다. 중간 정도 이상의 우울(자가보고형 우울척도 10점 이상)을 느낀다는 비율도 33.1%로 나타났다.
또 47.1%는 지난 1년 동안 건강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심각한 스트레스를 경험한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령별로는 40대의 비율이 55.4%로 가장 높았다. 소득 수준별로는 저소득층일수록 경험 비율이 높아 200만 원 미만 구간에서는 58.8%를 기록했다. 또 기존의 역할과 책임 수행이 불가능할 정도의 정신건강 위기를 경험한 적 있다고 한 응답자가 네 명 중 한 명이 넘는 것(27.3%)으로 나타났다. 이들 중 절반에 달하는 51.3%는 자살을 생각했으며 그중 13%는 실제로 시도했다고 응답했다.
유명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본 조사를 통해 사회 구성원의 정신건강 증진과 정신건강 위기를 대비하는 정책과 사업의 강화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존재함을 확인했다”며 “앞으로 정신건강 위기의 취약 집단을 파악하고 도움의 방안을 모색하는 노력이 더 많아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박경민 기자 me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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