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 다시 희망으로] 세이브더칠드런, 관리 사각지대 조명
현장 구호팀, 산불 피해지역 실태 조사… 86가구의 아동 138명 피해 자체 집계
아동 1명 당 200만 원과 물품 등 지급… 재난 경험 씻어 줄 심리-정서 지원도
정부, 올해 첫 취약층 피해조사 추진… “주택복구-생계비 등 장기 지원 필요”
세이브더칠드런은 산불 피해 지역 현장을 찾아 피해 규모를 조사해 피해 아동 가정 86곳에 긴급생계비와 물품을 지원했다. 세이브더칠드런 제공
2025년 3월 21일 경남에서 시작된 산불은 건조한 날씨에 강풍을 타고 경북과 울산 울주로 번졌다. 무려 149시간 동안 꺼지지 않은 불길은 전국적으로 역대 가장 넓은 피해 면적을 기록했다. 주택과 공장, 문화재를 포함해 수천 개의 시설이 전소됐고 35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특히 안동, 의성, 청송 등 고령 인구가 많은 지역에서는 신속한 대피가 어려웠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업고 탈출하거나 이웃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피신한 경우도 있었다.
정부와 언론은 주로 고령층의 피해와 주택 복구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나 그 틈에서 잊힌 존재가 있었다. 바로 아이들이다. 같은 재난이지만 아이들만의 위기는 따로 있다. 국제아동권리 NGO 세이브더칠드런은 이번 산불이 남긴 아동 피해의 사각지대를 조명하고자 한다.
산불이 난 날 주민 A 씨는 두 아이를 데리고 간신히 집을 빠져나왔다. “방송도 못 들었어요. 누가 문을 두드려서 그제야 알았죠. 불이 순식간에 넘어와서 차를 타고 도망쳤는데 길이 통제돼서 새벽까지 빠져나오지 못했어요. 차 안에서도 불길이 보였어요. 무서워서 눈물밖에 안 나왔어요.”
산불의 충격은 아이들에게도 깊게 남았다. 아이들은 집이 불타는 꿈을 꾸며 밤마다 울었다. 겉으로는 괜찮아 보여도 그날의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어른처럼 상황을 설명할 수 없는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 피해자로 남았다.
산불 피해 지역은 대부분 고령화가 심각한 농촌이다. 실제로 안동시 전체 인구 중 65세 이상이 26.4%를 차지하며 아동 인구는 10%에도 미치지 않는다. 그래서 재난 대응에서 아이들은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재난 취약계층인 아동에 대한 보호 체계의 부재가 드러났다. 행정기관조차 피해 아동의 정확한 수를 파악하지 못했고 대피와 지원 기준도 없었다.
산불 피해 가정에 물품을 지원하는 모습.국제아동권리 NGO 세이브더칠드런은 재난 직후 지역본부 직원 모두 비상 체제로 전환하고 현장을 찾았다. 재난 발생 24시간 내 모니터링을 시작해 48시간 동안 대피소를 돌며 아동과 가정의 피해 규모를 조사했다. 아동이 있는 가구는 총 86가구, 138명의 아동이 피해를 본 것으로 파악했다. 특히 안동의 경우 1737채의 주택이 불타고 53명의 아동이 피해를 봤다. 영덕에서는 1391채의 주택 전소와 함께 44명의 아동 피해가 확인됐다.
하지만 이 정보는 정부의 공식 통계에 없다. 해당 데이터는 세이브더칠드런이 지자체와 교육청을 통해 자체적으로 수집한 것으로 일부 오차가 있을 수 있다. 당시 현장을 방문한 세이브더칠드런 아동권리사업팀 홍용균 매니저는 행정안전부 보고서에 아동 피해가 따로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행안부는 아동의 피해 상황을 따로 집계하지 않으니 교육청이나 도청에 직접 연락해 파악해야 했죠. 저희가 직접 대피소에 방문해 텐트를 일일이 돌며 아이가 있는지 확인하고 이름과 연락처를 기록했어요. 그렇게 확인한 뒤 아이들에게 필요한 물품을 지원했어요.”
행정안전부의 재난 대응 매뉴얼에는 장애인, 노인, 어린이 등 안전취약계층에 대한 피해 통계나 위기관리 매뉴얼이 없다. 아동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도 거의 없고 아동을 위한 전문 보호 인력이나 상담 체계도 부족하다. 2019년 강원 고성 산불 때도 비슷한 문제가 지적됐지만 제도는 바뀌지 않았다.
최근 정부는 처음으로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에 따라 안전취약계층의 재난·사고 피해에 대해 실태 조사를 하겠다고 밝혔다. 재난 상황에서 누구의 도움을 받았는지,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지를 조사해 정책 개선에 반영하겠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이제 시작 단계이다.
대피소에는 아이들을 위한 준비가 거의 없었다. 응급구호세트, 모포, 셸터, 간단한 생필품과 식료품은 있었지만 어린이용 칫솔이나 속옷, 신발, 간식, 놀잇감, 학용품 등은 마련되지 않았다. 가족과 함께 대피한 아이들은 좁고 낯선 공간에서 긴장한 가운데 말없이 시간을 보냈다.
세이브더칠드런은 ‘아동 우선’ 원칙에 따라 현장에 대응했다. 현장 구호팀은 안동, 청송, 의성 등 피해 지역 대피소를 직접 방문해 아동 피해 실태를 조사했다. 또한 아이들이 단체로 생활하는 양육시설이 피해를 당하지 않았는지 찾아다녔다. 지역아동센터 협회를 통해 피해 아동 수와 지원 필요 여부를 매일 확인했다.
세이브더칠드런은 피해 지역에 아동용 물품을 지원했다.피해 지역에서는 아동용 물품을 구하기 어려웠다. 고령자가 많은 지역 특성상 아동용 물품을 구하기 어려워 외지의 대형 마트까지 나가 겨우 옷, 신발, 장난감, 학습 교구를 사와야 했다. 물건을 받은 아이들은 처음으로 웃음을 보였다.
산불 피해 가정은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했다. 가정마다 또 아이마다 필요한 것이 달랐다. 세이브더칠드런은 피해 아동 가정 86곳에 대해 아동 1명당 200만 원, 가구당 최대 500만 원의 긴급생계비를 지원했다. 세이브더칠드런은 산불 피해에 대응하기 위해 가장 빠르게 현금을 지원한 단체다. 평소 지역사회와 긴밀한 협력 덕분에 피해 아동을 빠르게 파악해 지원할 수 있었다.
산불로 직접 지은 집을 잃은 C 씨도 긴급생계비를 지원받았다. “마을에 다 불이 붙었더라고요. 구조대가 우리를 배로 구조할 때까지 바닷가에 갇혀 있었죠. 집도 잃고 생계도 막막했어요. 긴급생계비로 아이 학비와 병원비, 장사 도구를 마련했어요. 그 덕분에 버틸 수 있었어요. 나중에 저도 후원하고 싶어요.”
산불 피해 지역의 아이들은 불길 속에서 집과 마을을 잃었다. 이들은 큰 변화를 겪으며 일상적인 스트레스를 견디고 있다. 마을과 학교의 변화뿐만 아니라 자신의 안전과 미래에 대한 불안도 느끼고 있다. 현재 아이들은 세이브더칠드런이 운영하는 재난 경험 아동 심리·정서 지원 프로그램에 참여 중이다. 이들은 흰 종이 나비에 두려움과 힘든 감정을 적어 날려 보내며 마음을 치유하고 있다. 이 활동은 아이들이 겪은 고통을 밖으로 표현하고 서로의 감정을 나누며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는 중요한 시간이다.
세이브더칠드런 동부지역본부 장성준 지역본부장대행은 장기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산불은 꺼졌지만 아이들의 일상은 아직 복구되지 않았어요. 재난에서 아동은 가장 취약하지만 가장 늦게 주목받죠. 아이들에게 절실한 것은 산불 이전의 하루예요. 앞으로 주택 복구, 생계비 지원, 지역 복지시설과 연계한 장기적인 지원을 통해 아이들이 일상을 빠르게 회복할 수 있도록 도울 계획입니다.”
산불 피해 아동 긴급구호 모금
세이브더칠드런 공식 홈페이지, 네이버 해피빈, 하나은행 계좌 379-910018-03104(예금주: 세이브더칠드런코리아). 후원금은 의성, 안동, 청송, 영덕, 산청, 하동, 영양, 언양, 온양 등 피해 지역의 아동 구호 물품, 긴급생계비 지원, 아동 복지시설 지원, 재난 피해 아동 심리 회복, 주택 개보수, 아동 물품 지원 등에 사용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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