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리포트] 인구 소멸 대응책 ‘문화 복지’
상업 영화관 없는 지역에 개관… 농촌-군소도시 주민들 큰 호응
“1시간 걸리던 영화관, 집앞에”… 12년 새 20배 늘어 전국 71개
문화생활 위한 이탈 줄어들어, 지역 경제 활성화에도 기여
적은 인구-값싼 푯값에 운영난… “문화 복지 정부 역할 확대해야”
경북 영양 작은영화관에서 지난해 열린 ‘작은영화관 기획전’의 ‘영화와 환경 이야기’ 프로그램. 2013년 3곳이었던 작은영화관은 올해 71곳으로 12년 만에 20배 이상 늘어났다. 한국작은영화관협회 제공
《문화 옹달샘 ‘작은영화관’의 한숨
문화시설이 부족한 농촌, 군소도시 등 인구 감소 지역에 세워진 공공영화관, ‘작은영화관’은 지역에 작지만 큰 행복을 선사하고 있다. 그러나 정부 지원이 줄고 지자체 재정도 한계가 있어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칠십 인생 여태껏 살면서 영화관을 처음 와봅니더. 오늘 영화 볼 생각에 들떠서 며칠 동안 잠도 설쳤어예.”
지난달 13일 오전 경남 의령군 의령읍 ‘도깨비작은영화관’에서 만난 유윤분 씨(74)는 생애 첫 영화관 나들이에 들떠 밝게 웃었다. 영화 시작 40분 전부터 도착한 그는 상영작 포스터를 바라보다 새삼 감격스러웠는지 눈시울을 붉혔다.
의령에서 나고 자란 유 씨는 평생 농사일과 자식 뒷바라지로 문화생활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유 씨는 “큰 영화관 가려면 의령을 나가야 하는데 버스로 왕복 두세 시간이 걸려 갈 엄두도 못 냈다”고 했다.
그는 최근 지자체가 운영하는 노인 대상 평생교육 프로그램인 ‘노인대학’을 다니며 처음으로 작은영화관의 존재를 알게 됐다. 유 씨의 집에서 버스로 불과 20분 거리였다. 이날 노인대학 수강생 등 28명과 함께 영화관을 찾은 유 씨는 “이제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시간을 내서 오려고 한다”고 말했다.
● 2만5000명 사는 의령군에 연 관람 2만2163명
의령군 도깨비작은영화관은 2023년 군이 총사업비 35억 원을 들여 총면적 499.56m², 지상 1층 규모로 개관한 ‘공공 영화관’이다. 1990년대 ‘의령극장’이 폐관하고 인구 2만5000명인 소도시 의령군에는 한동안 영화관이 없었다. 상업 영화 시설이 들어오기엔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싶은 군민들은 대중교통으로 편도 1시간 이상 걸리는 경남 진주나 창원까지 나가야 했다.
의령극장 폐관 30년 만에 도깨비작은영화관이 개관하면서 군민들의 ‘원정 관람’도 끝났다. 군에 따르면 이곳 영화관을 찾은 관람객은 지난해만 2만2163명에 이른다. 군 전체 인구에 맞먹는 수다.
기자가 방문한 날도 평일이었지만 63석, 37석 규모 상영관 두 곳뿐인 영화관에 적지 않은 관람객들이 보였다. 차로 20분 거리인 용덕면에 산다는 정을영 씨(82), 최부자 씨(82) 부부는 바쁘게 사느라 아내와 극장 데이트가 40년 만이라고 했다. 정 씨는 “말로 못 할 정도로 벅차다”며 “영화 보고 시장에 들러 식사까지 하고 집에 갈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노부부는 손을 꼭 잡고 상영관 안으로 들어갔다.
영화관 건물에는 간식 코너와 휴게 공간도 있어 여느 상업시설 못지않았다. 건물 지붕에는 영화관의 상징이자 의령군의 관광 유산인 도깨비 조형물이 우뚝 서 있었다.
도깨비작은영화관과 같은 ‘작은영화관’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민간 영화관이 진입하기 어려운 군소 도시에 조성된 소규모 상설 공공 영화관이다. 보통 총 100석 내외 규모로 도깨비작은영화관처럼 상영관 1, 2곳으로 구성됐다.
2010년 전북 장수군이 세운 ‘한누리영화관’이 농촌 지역 주민들에게 문화 향유 기회를 제공하며 호평을 받자, 문화체육관광부가 연구와 시범사업을 거쳐 2013년 인구 감소 지역에 ‘작은영화관 건립 사업’을 시작했다. 정부가 일부 비용을 지원해 영화관을 건립하면 지자체가 직접 운영하거나 민간에 위탁해 운영하는 사업이었다.
지역의 호응이 높아 최근 10여 년 새 그 수가 크게 증가했다. 문체부와 한국작은영화관협회에 따르면 첫해 3곳이던 작은영화관은 2020년 34곳, 올해 65개 시군에 71곳까지 늘었다. 12년 만에 20배 이상 증가한 셈이다. 강원이 17곳으로 가장 많고 전남 13곳, 전북 9곳, 경남 8곳 순이다.
지난달 30일 오전 찾은 ‘1호 작은영화관’ 한누리영화관에는 평일임에도 적지 않은 관람객들이 모여 있었다. 장수군이 문화체육시설인 한누리전당 내 전시 공간을 개조해 만든 영화관은 54석, 36석 규모 상영관 두 곳으로 구성됐다. 이날 상영관에서는 최신 외화인 ‘미션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 등 상영이 한창이었다. 타지에 사는 자녀들과 함께 영화관을 찾았다는 고강영 씨(80)는 “옛날엔 영화 한번 보려면 인근 도시까지 차로 1시간 이상 나가야 했는데 지금은 걸어서 영화를 보러 올 수 있다”며 “영화관 덕에 도시와 문화 격차가 확 줄어든 느낌”이라고 했다.
장수군에 따르면 영화관은 군이 진행하는 이용 만족도 조사에서 매년 ‘매우 만족’ 평가를 받고 있다. 영화관 설립 업무를 맡았던 이광섭 장수군 민원과 팀장은 “영화관이 생기면서 문화생활을 위해 도시로 나가는 발길을 붙잡을 수 있었고, 그만큼 지역에 소비가 늘면서 동네에도 활기가 생겼다”고 말했다.
● 주민 만족도 높지만 적자 늪
지역과 지역 주민 모두 만족하는 공공시설이지만 많은 작은영화관이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인구 감소 지역에 위치하다 보니 관람객이 상대적으로 적고 확장성에 한계가 있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영양작은영화관’이 들어선 경북 영양군의 경우 올해 4월 기준 인구가 1만5281명에 불과해 전국 229개 지방자치단체 중 섬을 제외하고 인구가 가장 적었다. ‘양구정중앙시네마’가 건립된 강원 양구군은 인구 2만 명대를 겨우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서울 시내 상업 영화관들의 경우 많으면 하루에도 수만 명의 관람객이 찾는 걸 감안하면 매우 적은 수다. 더욱이 지역 문화 복지 차원에서 푯값마저 저렴하게 받고 있어 적자가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의령 도깨비작은영화관의 경우 2D 영화 푯값이 7000원, 3D 영화가 9000원으로 상업 영화관 절반 수준이다.
지속적인 운영을 위해서는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지만, 인구 감소 지역 지자체들의 예산도 넉넉하지 않다. 의령 도깨비작은영화관의 경우 군이 연간 운영비 1억 원을 지원하고 있지만 어려운 상황이 지속되자 올해부터 고향사랑기부금 3000만 원을 추가로 투입해 운영난을 해소했다. 하지만 언제까지 지원을 계속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경남 합천시네마의 경우 위탁업체 파산으로 문을 닫았다가 2020년 군 직영으로 전환해 재개관했으나, 군이 적자를 감당하지 못하면서 2023년 또 휴관했다. 현재는 민간 위탁으로 운영되고 있는 상태다.
그러나 민간 위탁 영화관의 경우 재정 지원 조건이 까다로워 운영비를 지원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지방재정법, 보조금법에 따라 기업이 지자체 민간 위탁 사업을 지원하거나 정부와 지자체가 민간 위탁 업체에 보조금을 지급할 때는 공공성, 타당성, 투명성 등 깐깐한 요건을 통과해야 한다.
● 정부 지원도 줄어… “내년엔 몇 곳 남을지”
이에 작은영화관의 운영을 지원하는 비영리조직 ‘작은영화관사회적협동조합’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 조합은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위기 때 재정난으로 파산했다. 이 때문에 조합이 운영하던 34곳이 폐관 위기에 몰렸다가 지자체가 운영을 넘겨받으면서 가까스로 위기를 넘긴 일이 있다.
지속적으로 운영비를 확보하려면 정부 지원을 받는 게 가장 좋지만 건립비를 지원하던 정부는 2020년 해당 사업마저 중단했다. “지역 주민들에게 혜택을 주는 사업이기에 지역에서 운영하고 지원하는 게 원칙적으로 맞다”는 이유에서다. 문체부는 2014년부터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기금을 통해 운영비 일부를 지원하던 ‘작은영화관 기획전 상영 지원 사업’ 지원금도 줄였다. 사업 초기 3년은 연 6억3800만 원 지원했는데 2017년부터 4억7600만 원으로 1억6200만 원 감액했다. 영화 관람객이 감소하면서 영화관 입장권 수익 중 일부로 충당되는 영화기금이 줄어들었고, 한정된 재원으로 여러 사업을 지원해야 하다 보니 감액할 수밖에 없었다는 게 문체부 관계자의 설명이다.
전국 작은영화관들이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돕는 비영리 단체인 한국작은영화관협회 관계자는 “어느 곳이 심하다고 말할 수 없을 만큼 운영이 모두 어려운 지경”이라며 “영화관 1곳당 6, 7명이던 직원을 2, 3명으로 줄이고 상영 횟수를 절반 이하로 줄이는 등의 자구 노력으로 적자를 막고 있지만 올해가 지나면 몇 곳이 문을 닫을지 예상할 수 없다”고 말했다.
● “문화 복지는 인구 감소 대책… 정부 나서야”
경제인문사회연구회가 2021년 발간한 ‘지역 불평등: 현황과 개선 방안 총괄 편’에 실린 연구에 따르면 비수도권 주민이 수도권으로 이주하려는 주요 요인 중 하나가 ‘문화 시설 및 서비스’ 여건 개선에 대한 기대감이었다. 비수도권 주민이 느끼는 ‘문화·여가 시설 및 서비스’ 불평등은 일자리 불평등과 비슷한 수준일 정도로 컸다.
인구 감소 지자체들은 작은영화관을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다. 경남도는 전국 처음으로 5일장 장날에 맞춰 농촌 어르신들에게 영화 관람 기회를 제공하는 ‘어르신 영화관 나들이 사업’을 통해 작은영화관 관람료를 지원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도민뿐 아니라 타 시도 관광객도 관람료 3000원을 지원받을 수 있다. 작은영화관이 가장 많은 강원도는 노후한 영화관 시설 개보수를 지원하고 있다.
제주도는 2021년 설립한 한림작은영화관에 맞춘 특화 프로그램 개발하고 있다. 영화관을 운영하는 제주콘텐츠진흥원 관계자는 “제주 출신 감독의 영화나 독립·예술 영화를 선보이는 방식으로 다양한 영화 프로그램을 통해 지역 주민들의 문화 활동을 확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문화 복지가 지역 인구 감소 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 중 하나인 만큼 정부의 재정 지원이 뒤따라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진형 경남연구원 연구위원은 “수준 높은 영화 콘텐츠를 상시 제공하는 작은영화관은 이용자들의 만족도가 높은 공공 문화 플랫폼”이라며 “군소 도시 지역민들이 차별 없는 문화 혜택을 누릴 수 있어야 인구 감소도 막을 수 있다는 점에서 정부가 다시 관심을 갖고 예산을 꾸준히 반영해 지속가능성을 뒷받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지자체, 정부 지원과 별개로 자구책을 찾아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함주리 한국작은영화관협회 사무국장은 “다양한 계층이 찾을 수 있는 문화 행사를 열거나 소외 계층을 위한 문화바우처를 작은영화관에서도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문화적 가치를 높일 수 있는 다양한 활성화 방안을 기획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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