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할 땐 루틴이 약… 선수들 마음 치료하는 ‘멘털 코칭’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6월 28일 0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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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클리 리포트] “누구나 흔들린다, 불안을 인정하라”… “보기 뒤 물 한 모금 루틴으로 넘어라”
경기 전 누구나 두렵고 떨려… “긴장은 몸이 깨어나는 신호”
루틴은 조바심 이기는 방패… 몸을 움직이면 마음도 속아
거창한 목표보다 현재에 집중… 매일 충실하면 성과로 연결돼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 불안 받아들일 때 제어력 생겨

멘털 코칭은 불안감을 인정하고 ‘루틴’으로 감정을 통제하라고 조언한다. 챗GPT로 생성한 이미지.
멘털 코칭은 불안감을 인정하고 ‘루틴’으로 감정을 통제하라고 조언한다. 챗GPT로 생성한 이미지.
“야구를 몇 년 했는데. 20년은 거뜬히 넘었을 거 아냐? 머리는 한순간 잊는다 해도 몸은 확실히 기억하니까 걱정 마라.”

야구광으로 유명한 일본 소설가 오쿠다 히데오(66)는 2004년 펴낸 ‘공중그네’에 이렇게 썼다. 소설뿐 아니라 현실에도 ‘몸이 기억을 잃어버리는 증상’이 있다. 야구를 포함한 스포츠계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입스(yips) 증후군’이다.

입스는 심리적인 이유로 근육이 굳어 평소에는 자연스럽게 할 수 있던 동작을 제대로 못 하는 증상을 가리킨다. 입스가 온 골퍼는 공을 앞에 두고 어쩔 줄을 모른다. 투수는 스트라이크를 제대로 던지지 못한다. 땅볼을 잡은 후 1루로 송구를 못 하는 경우도 있다. 적지 않은 선수들이 끝내 입스를 극복하지 못한 채 선수 생활을 마감하곤 한다.

● 심리가 곧 기량이다

프로야구 KT 위즈 투수 A에게도 3년 전 예고 없이 입스가 찾아왔다. 투구 폼은 그대로인데 공이 자꾸만 엉뚱한 곳으로 빠졌다. 마운드에만 서면 다리가 굳고 손끝이 떨렸다. 심호흡을 해도 가쁜 숨은 멈추지 않았다(‘그 시절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숨이 막힌다’는 선수 요청에 따라 실명은 밝히지 않는다).

당시 퓨처스리그(2군)에 있던 A는 팀 내에서 ‘성실함의 대명사’로 통했다. 마침 구위가 올라오면서 ‘곧 1군 무대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입스가 이 모든 걸 무너뜨렸다. A는 “정말 오래 고생하면서 버텨 왔는데 눈앞이 아득해지더라. 더그아웃에서 마운드를 향하는 몇 걸음 안 되는 그 길이 너무 멀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A는 같은 팀 안영명 멘털 코디네이터(41)를 찾아가 도움을 구했다. 안 코디네이터는 그해 5월 13일을 마지막으로 18시즌에 걸친 프로야구 선수 생활을 끝낸 뒤였다. 선수 시절부터 멘털 코칭에 관심이 많았던 안 코디네이터는 공익근무요원(현 사회복무요원)으로 복무하던 2011∼2013년 시간을 내 스포츠심리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안 코디네이터는 A에게 “야구를 그만두면 제2의 인생을 어떻게 살고 싶냐”고 물었다.

“솔직히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이라 놀랐다”는 A는 “‘작은 선술집을 하고 싶다’고 답했다. 이상하게 그러고 나니까 꽉 막혀 있던 마음에 숨구멍이 트인 듯 편안해졌다. 야구를 그만둘 각오였는데 그 뒤로 3년이 지난 지금까지 야구를 하고 있다”며 웃었다.

안 코디네이터는 올해도 ‘현장에서’ 선수들 곁을 지키며 ‘상담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운동장 한편이나 더그아웃 뒤 복도도 언제든 ‘즉석 상담실’이 된다. KT 관계자는 “선수들이 ‘형’이라고 부르면서 먼저 다가가기도 하고 안 코디네이터가 힘들어 보이는 선수에게 먼저 상담 신청을 하기도 한다”면서 “처음에는 심리 상담이라는 말에 부담이나 거부감을 느끼는 선수가 적지 않았다. 이제는 문턱이 한층 낮아진 느낌”이라고 전했다.

안 코디네이터는 “‘스포츠는 멘털’이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멘털 코칭을 받는다고 하면 ‘그 시간에 기술 훈련이나 더 하지’라는 이야기를 듣기 십상”이라며 “2군 선수 중 절반 이상이 기술적으로는 이미 1군급이다. 심리도 기량의 일부다. 멘털이 단련되면서 1군 출전이 늘어나는 선수를 여럿 봤다”고 말했다.

● 두렵고 떨려도…

멘털 코칭이라는 말은 ‘정신력 강화 훈련’ 같은 느낌이 든다. 실제 멘털 코칭은 기본적으로 선수가 마음과 머리, 몸 사이의 관계를 인지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데 초점을 맞춘다. 그러려면 일단 선수가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또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법을 알아야 한다.

안 코디네이터는 “어릴 때부터 ‘프로는 감정을 드러내면 안 된다’고 배운 선수가 많다.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털어놓는 것을 여전히 나약하다고 생각하는 선수가 많은 이유”라고 말했다.

야구 선수가 일상적으로 제일 많이 느끼는 감정은 뭘까.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를 60년 넘게 취재한 기자이자 책 17권을 펴낸 작가인 레너드 코페트(1923∼2003)의 대표작 ‘야구란 무엇인가’에 힌트가 들어 있다. 코페트는 이 책 첫 문장에 낱말을 딱 하나 쓰고 나서 마침표를 찍었다. ‘두려움(Fear).’

이럴 때는 ‘호랑이에게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속담이 떠오른다.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라는 여덟 글자를 떠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멘털 코칭에서는 불안한 감정을 억지로 다스릴 필요가 없다고 제안한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돼. 이렇게 생각해야 해”라고 마음을 고쳐먹는 게 아니라 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는 것이다.

지난해 은퇴한 와다 쓰요시(44)는 일본프로야구(NPB)를 대표하는 왼손 에이스였다. 소프트뱅크 소속의 와다는 신인이던 2003년 NPB 챔피언을 가리는 일본시리즈 최종 7차전에 선발 등판해 완투승을 거뒀다. ‘강심장’이라는 찬사가 뒤따른 게 당연한 일. 그러나 와다는 “선수 생활 내내 마운드로 향하는 길에는 매번 두려움과 긴장감이 찾아왔다. 특히 2003년 일본시리즈 때는 경기 내내 끔찍할 정도로 긴장했다. 경기를 마친 뒤에도 내가 헹가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 의아할 정도였다”고 했다.

와다는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 이 긴장감과 함께 살기로 마음먹었다. 와다는 “최대한 긴장한 상태로 경기에 들어가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자고 생각을 고쳐먹었다”면서 “그러고 나니 긴장감을 신체가 집중하기 시작했다는 자연스러운 신호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다른 종목 선수도 비슷하다. 세계 4대 마라톤 대회 중 하나인 뉴욕 마라톤에서 1980∼1982년 3년 연속 우승한 알베르토 살라사르(67·미국)는 “의심과 불안은 매일 계속해 일어난다. 내가 이 사실을 조금 더 일찍 받아들였으면 좋았을 것”이라며 “선수들을 지도할 때도 ‘부정적인 생각과 싸우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조언한다”고 말했다.

MLB 멘털 코칭의 선구자로 통하는 켄 라비자 박사(1948∼2018)도 같은 맥락으로 접근했다. 라비자 박사는 선수들에게 이렇게 묻곤 했다. “당신은 기분이 좋을 때만 야구를 잘하는 그런 형편없는 선수인가(Are you that bad that you have to feel good to play well)?” 그러면서 “현재에 머물러라.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Be present, not perfect)”고 강조했다.

이 불안감을 인정하고 나면 항상 해 왔던 ‘루틴’을 통해 마음을 속일 수도 있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에서 통산 7승을 거둔 ‘골프 천재’ 김효주(30)는 “보기를 한 뒤에는 습관적으로 물을 한 모금 마신다. 보기 후엔 다음 홀에서 버디로 만회해야 한다는 마음이 생겨 긴장하게 된다”면서 “물을 마시는 행위로 홀과 홀 사이의 감정을 단절시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미국), 로리 매킬로이(북아일랜드), 리디아 고(뉴질랜드), 박인비, 고진영 등 세계적인 골퍼들도 모두 멘털 코치의 도움을 받아 감정을 통제하는 자신만의 방법을 갖고 있다.

● 믿으며 기다리면…

프로야구 KT의 안영명 멘털 코디네이터(위쪽 사진 왼쪽)가 선수와 상담을 하고 있다. 아래쪽 사진은 프로배구 여자부 흥국생명 김세영 멘털 코치(왼쪽)가 선수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선수 출신인 안 코디네이터와 김 코치는 형이나 언니처럼 선수들에게 편안하게 다가간다. KT·흥국생명 제공
프로야구 KT의 안영명 멘털 코디네이터(위쪽 사진 왼쪽)가 선수와 상담을 하고 있다. 아래쪽 사진은 프로배구 여자부 흥국생명 김세영 멘털 코치(왼쪽)가 선수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선수 출신인 안 코디네이터와 김 코치는 형이나 언니처럼 선수들에게 편안하게 다가간다. KT·흥국생명 제공
멘털 코칭을 꼭 중후장대(重厚長大)한 목표와 연결 짓는 것도 오해에 가깝다. 운동선수가 성공하고 나면 ‘어린 시절부터 큰 꿈을 꿨다’는 이야기가 흔히 뒤따른다. 오타니 쇼헤이(31·LA 다저스)가 ‘대형 사고’를 칠 때마다 하나마키히가시고 재학 시절 작성한 ‘만다라트 계획표’가 화제에 오르는 게 대표 사례다.

일본 코칭 심리학자 히라모토 아키오 멘털 매니지먼트 스쿨 대표(60)는 “그 선수들이 꼭 큰 목표 때문에 성공했다고 볼 순 없다”고 말한다. 그는 자기 책 ‘목표 없이 성공하라’를 통해 “목표를 세워 성공한 사람보다 목표 없이 성공한 사람이 더 많다”고 주장했다. 히라모토 대표는 “사람은 가시적인 목표를 정해 놓아야 실천 의욕이 생기는 ‘목표 추구형’과 자기 소신과 내적 욕구에 충족감을 느낄 때 실천 의욕이 생기는 ‘심리적 만족형’ 두 부류가 있다”며 “전 세계 사람 가운데 80%는 심리적 만족형이다. 동양인 가운데는 그 비율이 더 높다”고 설명했다.

심리적 만족형은 현재에 집중하는 습관을 통해 일상에서 느끼는 만족감을 조금씩 높여가는 방식으로 성과를 거두는 유형이다. 오타니 이전에 일본인 타자 MLB 최다 홈런 기록(175개)을 보유하고 있던 ‘고질라’ 마쓰이 히데키(51·은퇴)가 이에 해당한다. 마쓰이의 좌우명은 ‘일일일생(一日一生)’이다. ‘그저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자’는 뜻이다. 마쓰이는 “(거창한) 목표를 세워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멘털 코칭 도입 초기 이 ‘일상적 접근’을 놓친 한국 프로구단들이 적지 않았다. 한국 운동선수 대부분은 어린 시절부터 ‘집단문화’에 익숙해 ‘외부인’에게 좀처럼 마음을 열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페이커’ 이상혁(29), ‘셔틀콕 천재’ 안세영(23), ‘스파이더 걸’ 서채현(22) 등을 카운슬링한 경험이 있는 김미선 케이스포츠심리상담 대표(48)는 “처음에는 일부 프로팀 선수들이 ‘이것도 고과평가 요소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다. ‘감독 눈치가 보이는데 무슨 말을 하겠냐’는 이야기도 종종 들었다”고 했다. 반대로 함께 선수 생활을 했고, 요즘도 일상을 함께하는 KT 안 코디네이터에게는 코치진 흉을 보는 선수도 적지 않다.

선수들 마음을 여는 데는 ‘자격증’보다 ‘라포르(rapport·신뢰와 친밀감)’가 중요하다. 멘털 코칭 관련 자격증이 따로 없는 김세영 프로배구 여자부 흥국생명 멘털 코치(44)가 대표적인 예다. 흥국생명은 ‘배구 여제’ 김연경(37·은퇴)이 이끌던 팀이지만 챔피언결정전 무대에서는 번번이 고개를 떨구곤 했다.

이에 흥국생명은 김연경이 팀 전체 분위기와 후배까지 챙겨야 하는 구조를 바꾸기로 했다. 그래서 영입한 인물이 2020∼2021시즌까지 팀 소속 선수였던 김 코치였다. 흥국생명은 김 코치를 영입하면서 “선수들의 정신적 멘토 및 맏언니로서 팀 성장에 큰 도움을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실업배구 시절부터 20년 넘게 코트를 누볐던 김 코치는 “예전에는 후배 선수가 팀 언니들에게 고민을 털어놓고 말할 수 있는 문화가 있었다. 그런데 요즘에는 선수들끼리도 속내를 꺼내기 어려운 분위기다. 그래서 내가 먼저 언니처럼, 엄마처럼 다가가려고 노력했다”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선수들이 좋아하는 카페에 함께 가서 대화를 나누곤 했다. ‘오늘 하루 어땠어?’ 같은 일상적인 질문으로 시작해 선수들 얘기를 많이 들어주고 방향을 잡아주려고 했다”고 말했다.

멘털 코칭에서는 이런 접근법을 ‘관계 기반 피드백(relationship-based feedback)’이라고 부른다. 진솔한 피드백은 마음과 마음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그 다리가 팀워크를 만든다. 2년 연속 챔프전에서 미끄러졌던 흥국생명은 2024∼2025시즌 챔프전에서 최종 5차전 승부 끝에 정상을 차지하면서 우승 갈증을 해소했다.

● 끝내는 닿는다

경기장에선 언제나 마음이 몸보다 먼저 뛴다. 여자 테니스 세계랭킹 2위 코코 고프(21·미국)는 2022년 프랑스 오픈 때 개인 처음으로 메이저대회 결승에 올랐다. 경기 시작 전 긴장감에 짓눌린 고프는 눈물을 한바탕 쏟은 뒤에야 겨우 코트를 밟았다. 결과는 이미 예정돼 있었다. 고프는 당시 세계 1위 이가 시비옹테크(24·폴란드)에게 1시간 8분 만에 0-2로 무기력하게 패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올해 6월 8일 고프는 다시 프랑스 오픈 결승 무대에 섰다. 이번에도 1세트는 내줬지만 2시간 38분에 걸친 승부 끝에 2-1 역전승을 거뒀다. 고프는 “예전에는 경기에서 지면 세상이 끝나는 줄 알았다. 이제는 패한 다음 날에도 해가 뜬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계속해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살면서 스포츠 대회 결승에서 지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일을 마주한다. 결승에 오른 것 자체가 행운이고 특권”이라고 했다.

멘털 코칭은 운동선수만을 위한 훈련법이 아니다. 누구든 흔들릴 수 있고, 그 흔들림을 다룰 수 있어야 한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는 말은 그저 위로가 아니다. 흔들리는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래도 괜찮다’는 마음가짐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면 된다. 부정적인 마음을 애써 억누르려 하지 않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 마음을 제어하는 힘을 얻는다.

이 기사 처음에 등장한 소설에는 이런 구절도 나온다. “제어력이란 게 뭐지. 사람은 언제 그것을 몸에 익히게 될까. 분명 명확한 해답 같은 건 없다. 오직 인간에게만 있는 불가사의한 학습 능력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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