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언어로 운동 경험 표현하고, 자신의 몸을 통해 과학을 익히며, 수학 개념으로 경기 전략을 짠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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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선수 삶과 연결한 스포츠 기반 교과 융합 수업해 보니…


● 학업 고민하는 학생 선수 맞춤 교과 융합 수업 캠프 개최

“공부를 많이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생각했는데, 고정관념이 바뀐 것 같아요.”

서울 고척중 레슬링 학생 선수 이기범 군은 14일 다시 태어난 기분으로 하루를 보냈다고 말했다. 이 군은 엘리트 체육 선수다. 운동과 공부를 병행한다. 아무래도 교과 공부는 모자라다고 느낀다. 진도를 따라가기 어렵다. 이 군과 같은 학생 선수들은 훈련도 하고 대회도 참가해야 한다. 일반 학생에 비해 공부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학교든 주변에서든 운동선수도 공부해야 한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늘 부담감이 있다. 학생 선수 맞춤 교과 수업을 받고 평가받을 수 있는 여건은 안 된다. 출석 일수를 채우고 최저학력제 기준도 맞춰야 한다. 중학생 선수는 35일 내에서 대회나 훈련 참가가 허용된다. 이를 넘으면 e-school 시스템에서 온라인 수업을 하고 출석을 인정받아야 한다. 전체 학생 평균 성적의 40% 미만 성적을 받아도 안 된다. 압박이 꽤 크다.

이날 학교에서 ‘학생 선수 미래 핵심 역량 성장 캠프’ 이틀째가 열렸다. 고척중 레슬링 학생 선수 15명이 참가한 캠프에서 이 군은 스포츠와 연관된 국어 수학 과학 사회 등 수업을 받으며 ‘공부할 줄 아는 나’를 봤다고 했다.

사단법인 한국체육진로교육협회가 주관하고 대한레슬링협회가 지원한 이번 캠프는 훈련과 대회 출전에 따른 교과 학습 결손, 학업적 자존감 저하 그리고 진로 선택의 폭 제한이라는 학생 선수의 문제를 해결해 보자는 차원에서 기획됐다. 한국체육진로교육협회 관계자는 “학생 선수들이 운동 선수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학업에 대한 긍정적 동기를 얻으면서 넓고 다양한 미래를 그릴 수 있는 힘을 얻게 하자는 취지로 실시했다”고 말했다.


● 레슬링으로 수학 개념 이해, 내 몸 데이터로 과학 배워

캠프는 체육 교사와 타 과목 교사가 협업하는 스포츠 기반 교과 융합 수업으로 진행됐다.

국어 융합 수업에서는 학생 선수들이 스포츠 규칙을 읽고 재구성해 봤다. 운동 선수라도 자기 종목 규칙을 제대로 읽어 본 경우는 드물다. 국어 교사가 규칙의 의미를 상세히 설명했다. 특정 스포츠 스타 선수를 가정해 그를 인터뷰하는 기사도 써 봤다. 국가대표나 프로 선수도 인터뷰를 어려워는 경우가 있다. 자신의 현재 기량 수준, 경기 상황별 대응, 팀 분위기 등을 조리있게 기자들에게 말한다는 게 쉽지 않다. 인터뷰 기사를 쓰면서 ‘나’를 어떻게 홍보해야하는지 생각하는 기회가 됐다.

국어 융합 수업에서 학생들은 레슬링을 문학 언어로 표현도 해보고, 본인이 레슬링 해설위원이 돼 경기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려보는 해설문도 써봤다.
또 시와 소설을 읽고 중요한 단어, 눈에 들어온 단어, 마음에 드는 단어 등을 골라 작품이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써 보고 줄거리도 요약해 봤다. 시와 소설에 나온 문학 언어로 레슬링을 표현해 보기도 했다. 레슬링 경기 영상을 보면서 스스로 해설위원이 됐다고 가정하고 2분 분량의 해설문을 쓰기도 했다.

사회 주제 토론 수업에선 자신의 생각과 감정, 행동을 관찰하고 친구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모아 자기 인식을 해 봤다. 이를 통해 자신의 레슬링 기술, 훈련 과제, 성공 인식, 도전 태도, 피드백 수용, 태도 변화 같은 마인드셋 체크리스트를 작성했다. 체크리스트를 토대로 성장 마인드 실천 계획을 세우고, 친구에게 보내는 응원 메시지도 적어 봤다. 이렇게 찾은 자신의 보완점을 바탕으로 STAR(Specific 구체적, Time 시기별, Area 영역별, Reflect 성찰) 원칙의 30일 계획을 구체적으로 짜 봤다.

고척중 레슬링 학생 선수들이 사회 주제 토론 수업 시간에 세계적 야구 스타 일본의 오타니 쇼헤이가 고교 시절 만들어 실천했던 만다라트 표를 참고해 자신만의 목표 달성표를 짜보고 있다. 한국체육진로교육협회 제공
세계적인 야구 스타 오타니 쇼헤이(LA 다저스)가 고교 시절 만들어 실천한 ‘만다라트’ 기법 계획표를 참고해 ‘나의 목표 달성표’를 작성했다. 오타니는 특급 프로 선수가 되기 위해 1개의 핵심 목표와 8개 세부 목표, 64개 실천 과제를 세워 행동으로 옮겼다. 오타니는 쓰레기 줍기, 청소하기 등도 반드시 실천해야 할 과제에 넣었다.

학생 선수들은 국가별로 경쟁력이 강한 스포츠 종목을 비교해 보고, 역대 올림픽 개최지를 퀴즈로 풀었다. 공정한 경기 문화에 대한 토론도 했다.

수학 융합 수업에선 스포츠에 담긴 수, 비율, 속도, 도형, 좌표의 원리를 배웠다. 100m 육상 선수들의 속도를 계산하고, 경기장 설계를 보면서 도형을 이해했다. 자신의 경기 전적으로 승률도 구해 봤다.

과학 융합 수업 시간에는 심박수 실험, 근육 작용 체험, 던지기 등을 하면서 운동과 에너지, 인체 구조를 알아봤다. 운동하면서 자주 접한 인바디 기기의 작동 원리와 장점을 파악하고, 그 결과지에 나오는 주요 항목의 의미도 배웠다. 골격근량, 체지방량, BIA(인체에 흐르는 전류의 저항을 측정해 체성분을 분석하는 것) 기술 등 모르고 지나친 개념을 자신의 인바디 측정 결과를 통해 익혔다. 이 개념들을 활용해 자신의 체중 조절 시뮬레이션 보고서도 만들었다.

과학과 체육 교사는 공동으로 학생 선수들이 익힌 개념을 다시 확인하는 문제도 흥미롭게 접근하도록 만들었다. 두 사람이 몸무게는 같은데 몸매는 차이가 나는 이유를 물으면서 근육과 지방의 밀도, 부피, 색, 기능, 대사 영향 등을 알게 했다. 과학을 담당한 전해지 교사(오주중)는 “운동선수의 무기인 몸을 해석하는 과학으로 접근했는데 반응이 좋았다”고 말했다.

통합 미션 수업에 학생선수들은 레슬링을 홍보하는 다큐 영상을 만들고, 자신의 꿈과 길을 찾는 ‘오리엔티어링’경기도 해 봤다.

● “내가 공부 관련 질문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아”… ‘학업은 세상을 보는 프리즘’

고척중 레슬링 학생 선수들이 스포츠 기반 교과 융합 수업을 하기 전서로 어색함을 없애려고 눈을 맞추고 가벼운 농담을 건네는 아이스브레이킹 게임을 하고 있다. 한국체육진로교육협회 제공
고척중 레슬링 학생 선수들이 스포츠 기반 교과 융합 수업을 하기 전서로 어색함을 없애려고 눈을 맞추고 가벼운 농담을 건네는 아이스브레이킹 게임을 하고 있다. 한국체육진로교육협회 제공
이번 캠프에 대한 만족도가 10점 만점에 9.2점이 나올 정도로 학생 선수들의 반응이 좋았다. 이들은 설문조사에서 ‘학습 동기 부여 및 목표 설정 부분에서 가장 도움이 됐다’고 밝혔다. 이어 ‘자기 관리 능력이 향상’됐고 ‘수업이나 공부에 자신감이 생겼다’고 했다. ‘공부 스트레스 관리 면에서 도움이 됐다’는 의견도 많았다. 15명 중 11명은 ‘나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다’고 답했다.

‘다음 캠프에도 참여하고 싶거나 친구에게 권유하고 싶냐’는 물음에는 전원이 ‘그렇다’고 답했다. ‘캠프에 바라고 싶은 것’에 대해서는 ‘친구끼리 서로 이해하는 레크리에이션 시간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 ‘공부를 해야하는 이유를 더 알려 달라’는 의견이 나왔다.

캠프에 참가한 김규리 학생은 “나에겐 새로운 시작이었다. 캠프 수업에서 배운 대로 운동과 학업을 병행하고 싶다. 마음가짐도 좋아졌다”고 말했다. 송휘문, 손예준 학생도 “공부를 해야 운동도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만족해 했다. 나혜윤 학생도 “앞으로 공부를 재밌게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내가 공부에 대해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인 줄 처음 알았다”는 반응도 나왔다.

앞서 캠프 실시 이전에 한 설문조사에서 학생 선수들은 ‘공부가 중요한 건 알지만 본인이 공부를 잘할 수 있다는 믿음은 상당히 부족’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공부에 대한 자신감’이 5점 만점에 1.9점이었다. 대다수는 진로에 대해 ‘계획이 없다’고 응답했다. 운동선수 이후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있었다.

한국체육진로교육협회는 캠프를 통해 학생 선수들의 학업과 진로에 대한 인식을 파악할 수 있었고 학습 동기 지속성 등에서 변화 가능성을 봤다고 평가했다. 한국체육진로교육협회 관계자는 “학생 선수들은 공부를 선수 생활 이후의 보험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 인식은 운동과 학업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프레임에 갇혀 있다는 증거”라며 “스포츠 기반 교과 융합 수업을 통해 교과 개념을 익히고 이를 자신의 몸과 삶에 적용해 보면서 학업이 ‘인생 플랜 B’가 아니라 운동 능력을 향상시키고 나아가 삶을 확장하는 프리즘 역할을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정훈 구룡중 교장(대한체육회 학교체육위원회 위원장)은 “학생 선수와 일반 학생을 구분하지 않는 공평성과 선수라는 특수성을 고려하는 공정성의 관점에서 학생 선수의 학습 동기를 끌어올리는 접근을 해야 한다”며 “최저학력제 대안으로 ‘기본 학력 보장제’(가칭) 도입의 공론화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에듀플러스#교과 융합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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