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에 밀리고, 경력에 밀려”…‘질 낮은 일자리’ 떠도는 시니어들

  • 뉴시스(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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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세 넘으니 안된다”…재취업 문턱에 막힌 고령층
휴게공간 없는 근무 환경…임금, 최저시급에 못 미치기도
전문가 “구조적 문제, 고령층 취업 구조적 대책 시급”

ⓒ뉴시스
“노인들은 재취업하면 주로 경비·보안 쪽으로만 갑니다. 그마저도 70세가 넘어가면 잘 뽑지도 않고요. 이젠 덤으로 사는 거죠”

지난달 30일 대한노인회 관악구지회에서 만난 오수남(70)씨는 정년퇴직 후 올해 3월까지 경비·주차 관리 업무를 했지만 기업 사정으로 권고사직을 당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오씨는 현재는 대한노인회 관악구지회의 일자리 알선을 통해 다시 구직에 나서고 있다. 대한노인회는 노인들의 사회활동과 재취업을 돕기 위해 전국 지회를 중심으로 일자리 알선을 진행한다.

그러나 기술직 등은 나이가 들수록 현장에서 일하기가 어려워 결국 경비·보안 업종밖에 선택지가 없는 상황이다. 구직을 원해 경비·주차 관리 업무에 지원하기도 했지만, 60대 초·중반 지원자들이 몰리며 자연스레 밀려나게 됐다.

단기 비정규직이었지만 경쟁률은 만만치 않았다.

현재 오씨 앞에 놓인 선택지는 그 중에서도 휴게공간이 없거나, 보수가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않는 일자리 뿐이다.

5일 통계청이 발표한 ‘2025년 5월 경제활동인구조사 고령층 부가조사 결과’에 따르면, 고령층(55세~79세) 취업자는 약 978만명으로 전년 동월 대비 약 34만4000명 증가했다.

그러나 전체 취업자 중 22.6%가 단순노무직, 14.5%가 서비스직에 종사했고 관리직은 2.1%, 사무종사직은 8.3%로 낮았다.

특히 생애 주된 일자리를 그만둔 비율은 69.9%에 달했다. 많은 노인들이 본래 하던 직종을 떠나 과거의 경력이 인정되지 않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으로 분석된다.

오씨의 사례처럼 나이에 밀려, 경력에 밀려 ‘질 낮은 일자리’로 밀려나는 고령층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강남의 한 빌딩에서 야간 경비로 3년간 일했다는 서용문(67)씨는 지난달 30일 대한노인회 관악구지회에서 뉴시스와 만나 그간 지하 숙소의 열악한 환경과 밤낮이 바뀐 생활을 버텨야 했다고 털어놨다.

지하 4층 보일러실 옆 숙소는 환기도 잘되지 않고 기계음이 끊이지 않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경비 일자리에 지원할 때마다 경력이 없어 번번이 탈락하다 보니 어렵게 얻은 자리를 포기하기는 쉽지 않았다.

서씨는 “주위에서 야간 경비는 1년이 10년을 갉아먹는다고 하지말라고들 했다”면서도 경력을 쌓기 위해서는 버틸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서씨는 “3년을 그렇게 사니 사람이 바보가 되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서씨는 3년을 버틴 끝에 서울대학교 관악학생생활관 경비직을 얻을 수 있었다. 근무 환경은 한결 나아졌다. 하지만 이곳마저 무인경비 시스템으로 전환되며 지난 5월 다시 일자리를 잃었고 현재는 다시 구직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같은 날 서울 관악구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만난 조득연(73)씨도 상황은 비슷했다. 아파트 관리소장으로만 25년 넘게 근무한 조씨는 과거엔 대규모 아파트 단지에서 일했지만 현재는 소규모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일하고 있다.

조씨는 “큰 아파트일수록 직원도 많아 업무가 분담되고 관리소장은 상대적으로 한가한 편”이라며 “소규모 아파트는 급여도 박하고 대우도 좋지 않아 젊은 사람들은 오지 않아 결국 나 같은 나이 많은 사람들이 맡게 된다”고 호소했다.

조씨는 “관리소장은 대우도 좋지 않고 주민과 동대표 사이에서 갈등이 있어 감정노동이 심하다”며 “많은 동료들이 1년을 채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곤 한다”고 말했다.

삼청동에서 만난 권기홍(68)씨도 최근 취업의 문턱을 체감했다. 미국 대학 졸업 후 호텔과 해외 식료품 영업장 매니저로 일하며 경력을 쌓았지만 한국에서 선택할 수 있는 일자리는 대부분 경비·보안직이었다.

한 달 전 귀국 후 심리상담사·병원동행매니저 등 민간 자격증을 취득하며 구직에 나섰지만, 이외 직종은 대부분 경쟁이 치열해 취업이 길어지고 있었다. 권씨는 “미국은 나이에 상관 없이 다시 쉽게 일할 수 있었지만, 한국 동료들은 정년 이후 일자리 찾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고령층 취업자가 특정 직종에 쏠리거나 열악한 일자리에 놓이게 되는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구조적 문제라고 짚었다. 김유빈 한국노동원 고용정책연구본부장은 “은퇴 이후에도 경력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아 결국 열악한 일자리로 밀려나는 것이 문제”라며 “양질의 일자리 창출이 더딘 것도 구조적 한계”라고 지적했다.

정순둘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도 “고령층이 단순 노무와 저임금 일자리에 몰릴 수밖에 없는 것은 본래 주력하던 자리에서 물러나 새로운 분야로 들어가기 때문”이라며 “신체 특성과 연령을 고려한 ‘고령 친화적 일자리’ 설계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단순 환경 개선을 넘어 장기적인 제도 변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진성진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은 “노동 수요 자체가 부족하고 은퇴 이후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재취업을 시도하는 구조적 문제가 있다”며 “재취업 지원서비스를 ‘생애 경력 개발 서비스’처럼 확장해 40~50대부터 정기적으로 퇴직 이후의 경로를 준비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서울=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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