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를 앞둔 올해 5월, 경북의 한 숙박업소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자신을 “특정 정당 홍보실장 이모”라고 소개한 남성은 선거 운동을 위해 지역을 방문한다며 객실 10개를 예약했다. 며칠 뒤 그는 다시 전화를 걸어 “선거팀 식사용 도시락 100개를 OO업체에서 주문해 달라”고 요청했다. 업주는 의심 없이 도시락을 주문했고, 800만 원을 송금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거짓이었다. 전화를 건 남성과 도시락 업체는 짜고 치는 ‘노쇼(예약부도) 사기단’이었다.
● 위조 공문·명함으로 속여 전국 피해
캄보디아를 거점으로 활동한 노쇼 사기단 114명이 경찰에 붙잡혔다. 강원경찰청 형사기동대는 군(軍) 간부와 정당 관계자, 대통령 경호처 직원을 사칭해 전국에서 560건의 노쇼 사기를 벌인 해외·국내 조직원 114명을 검거했다고 3일 밝혔다. 이 가운데 18명은 범죄단체가입·활동,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사기), 업무방해 등의 혐의로 구속됐다.
이들은 철물점, 식당, 숙박업소 등 영세 사업장을 상대로 예약 후 추가 물품 구매를 부탁하는 수법으로 범행을 저질렀다. 의심을 피하기 위해 위조 공문, 명함, 지출결의서 등을 정교하게 만들어 사용했다.
군 간부를 사칭한 사례도 많았다. “OO사단 김모 중사”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성은 진지 공사를 이유로 전북의 한 철물점에 삽과 곡괭이를 대량 주문했다. 이후 그는 “훈련용 식자재를 담당자가 누락했는데, 기존 거래처가 오늘 납품을 못 해 대신 OO유통에서 구해달라”고 요청했다.
평소 군부대와 거래하던 철물점 주인은 남성이 실제 부대 구조와 담당 업무를 세세히 언급하자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유통업체에 즉석식량(전투식량) 120상자, 1440만 원어치를 주문하고 대금을 송금했다. 유통업체는 “급한 상황 같다”며 물품을 먼저 보내줬고, 철물점 주인은 감사 인사까지 전했다. 하지만 이 역시 노쇼 사기였다.
‘노쇼사기단’의 조직도. 강원경찰청 제공● 캄보디아 콜센터 급습…10대 조직원도 검거
경찰은 지난해 12월부터 집중 수사에 착수해, 캄보디아 시아누크빌의 한 범죄단지에 설치된 노쇼 사기 콜센터를 특정했다. 이후 현지 경찰과 공조해 올해 5월 콜센터를 급습했고, 대대적인 검거 작전에 돌입했다. 이 과정에서 114명이 체포됐으며, 이 중에는 10대 4명도 포함돼 있었다.
조직은 해외총책이 현지 콜센터를 운영하며 국내 자금세탁조직과 중계기 관리조직을 지휘하는 구조였다. 콜센터는 ‘1선(군·정당·기관 사칭 전화팀)’과 ‘2선(식자재·물품 판매 업체 사칭팀)’이 한 조로 움직이며, 피해자가 신뢰하도록 대화 시나리오를 치밀하게 설계했다.
해외 자금세탁책은 국내 가상자산거래소를 거쳐 해외 거래소로 피해금을 옮겼고, 중계기 관리책은 서울·경기 일대를 돌며 통신 장비를 이동시켜 추적을 피했다. 경찰은 해외총책을 포함한 나머지 공범들을 계속 추적 중이다.
최현석 강원경찰청장은 “최근 공공기관이나 군부대를 사칭한 노쇼 사기가 급증하고 있다”며 “소상공인들은 대리구매 요청이 있을 경우 반드시 해당 기관의 대표번호로 사실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는 “경찰은 국제 공조를 확대해 해외 콜센터는 물론, 이들과 연계된 국내 세탁조직까지 끝까지 추적해 뿌리 뽑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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