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김다은(가명) 양은 지난달 이른바 ‘덕자금(덕질 자금) 이벤트’에 참여했다. 평소 좋아하던 아이돌 그룹과 관련한 게시글을 X(옛 트위터)에 퍼뜨려 주면 추첨을 통해 앨범 구매 등 팬 활동, 이른바 ‘덕질’을 위한 돈 100만 원을 주겠다는 글을 보고 응모한 것이다.
그런데 주최자는 “당첨금은 대신 불법 토토를 해서 마련할 테니 먼저 수수료를 보내라”고 요구했다. 김 양이 용돈을 긁어모아 3만 원을 송금하자 상대는 “토토가 당첨돼 덕자금에 더해 670만 원을 얻을 수 있다”며 20만 원의 ‘세탁비’까지 추가로 요구했다. 이상하다고 느낀 김 양이 수수료라도 돌려달라고 하자 상대는 돌변했다. 재촉하면 영업방해죄로 신고하겠다며 되레 협박한 것이다. 김 양은 “처벌받을까 봐 무서워 부모님에게도 말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 팬심 노린 신종 사기에 10, 20대 무방비 노출
김 양처럼 미성년자나 20대 사회 초년생의 팬심을 악용해 소액을 뜯는 금융사기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가해자는 처음엔 피해자와 같은 연예인을 응원한다며 접근해 경계심을 허물었다. 이달 초 피해를 당한 이선희(가명·14) 양도 팬클럽 활동 중 덕자금 이벤트를 접했다. 이벤트 담당자는 “5만 원 이상 맡겨주면 이벤트 당첨금 100만 원뿐 아니라 토토 수익까지 지급하겠다. 빨리 송금하라”고 했다. 이 양이 상대를 믿은 건 그가 8700명이 넘는 팔로어를 거느리고, 평소에도 아이돌과 관련한 글을 여러 건 올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양은 버스비까지 끌어모아 송금한 5만 원을 결국 돌려받지 못했다.
아이돌 덕질뿐 아니라 ‘추석 용돈을 뿌린다’는 식으로 대리 토토에 참여하라는 종용에 넘어가는 이들도 있었다. 한 22세 여성은 이런 꾐에 넘어가 인터넷은행 비상금 대출로 305만 원을 마련해 송금했다가 전부 잃었다.
사기 일당은 피해자에게 대리 토토 등 ‘불법 행위에 연루됐다’는 두려움을 심어 신고를 막기도 한다. 피해자가 돈을 돌려달라고 하거나 신고하겠다고 항의하면 “너도 불법 토토에 가담한 것이나 다름없다”며 협박하는 식이다. A 양(19)은 “피해를 공론화하겠다고 하니 상대가 바로 전화를 걸어와서 험한 말을 했다”며 “그 뒤로 무서워서 신고는커녕 X 계정을 삭제했다”고 말했다.
● ‘사기 신고해 준다’며 또 돈 뜯는 2차 피해
‘대리 토토 사기 박제 계정’을 운영하며 앞에서는 가해자를 신고해 주겠다고 속이고 뒤로는 추가 피해를 양산하는 2차 범죄도 횡행하고 있다. A 양은 “박제 계정은 ‘사기꾼을 신고해 준다’거나, ‘자신에게 돈을 맡기면 피해를 복구할 수 있다’는 식으로 돈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이런 덕자금 이벤트 사기는 아이돌 팬 계정처럼 프로필과 게시물을 꾸며 친근감을 유도하고 경계심을 낮추는 것이 특징이다.
손진희 숭실사이버대 청소년코칭상담학과 교수는 “같은 아이돌 멤버를 좋아하면 상대에 대한 신뢰가 즉각적으로 생기는 심리를 이용한 것”이라며 “특히 청소년은 또래 관계를 중시해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에게 쉽게 동질감을 느끼고, 금융 이해도가 부족해 유혹에 더 쉽게 빠진다”고 설명했다. 금융사기 방지 플랫폼 ‘더치트’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1∼6월) 사기 피해자는 10대(19.7%)와 20대(35.3%)가 절반을 넘었다.
전문가들은 플랫폼의 책임과 팬덤의 자정 노력도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박한호 원광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소셜미디어에서 불법 콘텐츠로 발생하는 피해에 대한 플랫폼 사업자의 배상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소정 영남대 심리학과 교수는 “문화 건전성 유지를 위해 팬덤 내에서 사기 경계심을 높이는 캠페인을 펼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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