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언어 파괴 아닌 언어 변화… ‘나쁜 말’을 위한 변론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월 25일 0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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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변화는 필연적인 과정일 뿐… 신조어에 대한 우려와 다른 관점
비하적 ‘듀드’ 흑인들의 ‘브로’ 등… 긍정적 의미 더해 주류 언어 부상
소수자의 말이 언어의 진화 주도… 다양한 사례 속 사회적 배경 소개
◇우리가 이렇게 말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어/발레리 프리들랜드 지음·염지선 옮김/396쪽·2만2000원·김영사

신간은 언어의 변화가 어디서 비롯되고, 어떤 의미를 갖고 있으며, 왜 더 많은 사람들이 변형된 언어를 사용하는지 설명한다. 발화자가 누구냐에 따라 똑같은 언어 현상에 다른 잣대가 적용되는 현실도 날카롭게 짚었다.
신간은 언어의 변화가 어디서 비롯되고, 어떤 의미를 갖고 있으며, 왜 더 많은 사람들이 변형된 언어를 사용하는지 설명한다. 발화자가 누구냐에 따라 똑같은 언어 현상에 다른 잣대가 적용되는 현실도 날카롭게 짚었다.
‘보컬 프라이(vocal fry)’는 요즘 미국에서 가장 핫한 논쟁거리 중 하나다. 목소리를 깔고 긁는 소리처럼 내는 발성인데 기름에 튀길 때 나는 소리와 비슷하다고 붙은 이름이다. 주로 젊은 여성의 말투로 인식되며, 지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조롱의 대상이 되곤 한다. 숱한 화제를 몰고 다니는 할리우드 스타 킴 카다시안이 대표적인 사례. 재밌는 건 20세기 최고 지성으로 꼽히는 미국 언어학자 놈 촘스키도 보컬 프라이를 쓴다는 점이다. 촘스키는 되고, 카다시안은 안 된다는 걸까. 똑같은 언어 현상에 다른 잣대가 적용되는 셈이다.

사람은 누구나 말할 때 무의식적으로 언어를 변형한다. 미 네바다대 사회언어학과 교수인 저자는 변형된 형태에 숨은 의미와 양상을 파악하고 그렇게 변형된 이유를 알아내고자 한다.

저자는 강연장에서 만나는 미국인들의 걱정이 한가지 공통된 주제로 수렴한다고 말한다. 요즘 들어 ‘거슬리는 화법’이 늘고 있다는 대목이다. 보컬 프라이뿐만 아니다. 한국어로 치면 ‘그러니까’, ‘막’에 해당하는 ‘like’를 너무 자주 사용한다든가, 말끝마다 ‘너무(so)’를 붙인다든가 하는 것들이다. 현대 영어에서 전체적으로 격식이 사라지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많은 이들이 이 같은 언어의 남용이나 파괴를 우려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지만, 이 책은 다른 관점을 취한다. 언어 변화는 자연스러운 일이며 언어 자체에 내재된 특성이라고 봤다. 언어는 반드시 변화하며 변화 자체를 피할 길은 없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이 책은 언어의 변화가 어디서 비롯되고 어떤 의미를 갖고 있으며왜 더 많은 사람들이 변형된 언어를 사용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재밌는 사례가 ‘녀석’ 등의 의미를 가진 ‘듀드(dude)’다. 저자는 초창기 듀드의 용례를 찾기 위해 1883년 뉴욕 월드지에 실린 한 시(詩)로 거슬러 올라갔다. 당시는 스포츠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레모네이드를 홀짝이는 힘없고 멋만 내는 남성을 조롱하는 단어였다. 그 시절에 듀드는 칭찬이 아니었다.

1930, 40년대 재즈의 시대와 함께 새로운 듀드의 시대가 열렸다. 주트 슈트를 입은 아프리카계나 멕시코계 이민자들이 스스로를 듀드라 일컬으면서 저항 문화를 상징하는 속어로 자리 잡았다. 나이 어린 저소득층 백인 남성 역시 이 단어에 담긴 배경을 공유하며 인종적 특수성을 넘어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이윽고 재즈를 좋아하고 사회에서 주류라고 인식하는 기준에 따르고 싶어 하지 않는 중산층 남성도 듀드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근사한 백인 듀드가 전면에 부상하기 시작한 것. 요즘엔 친밀하고 느긋한 동지애의 느낌으로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쓰인다. 듀드의 진화는 끝나지 않았다.

저자는 ‘나쁜 영어’라고 불릴 만한 것들 상당수가 미국 사회에서 소외된 집단과 관련 있다고 짚는다. 언어 자체보다 인종, 계층, 국적처럼 더 예민한 문제가 숨어 있을 때가 많다는 지적이다. 재밌는 건 언어 역사상 혁신을 꾸준히 주도해 온 계층은 사회적으로 더 낮은 위치에 있던 언어 사용자란 점이다. ‘브로(bro)’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오랫동안 사용하던 말이었지만, 최근 젊은 백인들도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며 형제애가 생겼다는 뜻으로 사용한다.

사례가 대부분 영어여서 다소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저자 특유의 유머가 곳곳에 녹아 있어 재밌게 읽힌다. 언어를 통해 역사를 공부하는 즐거움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그간 ‘올바르지 않다’고 평가절하된 언어들을 위한 변론이 무척 시원스럽다.

#언어 변화#사회언어학#언어 남용#언어 혁신#인종적 특수성#언어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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