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칠레의 프랑스인, 마법같은 100년 가족사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2월 1일 0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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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발 달린 법랑 욕조가 들은 기이하고 슬픈 이야기/미겔 본푸아 지음·윤진 옮김/280쪽·1만7000원·복복서가


30프랑과 포도나무 한 그루. 진디 때문에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자 1873년 고국 프랑스를 떠나기로 마음먹은 한 남성이 갖고 있던 전부다.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주하기 위해 배를 탄 그는 황열병에 걸렸다는 오해를 받고 칠레의 한 항구도시에 버려진다. 이름을 묻는 칠레 이민국 직원의 질문을 ‘어디서 왔느냐’로 잘못 알아듣고 프랑스 지명 ‘롱르소니에’를 열심히 외치자, 직원은 그에게 ‘롱소니에’라는 새 칠레 이름을 붙여준다.

우여곡절 끝에 칠레에서 사업가로 성공한 롱소니에는 프랑스 출신 부인을 만나 가정을 꾸린다. 집에는 청동으로 된 네 발이 떠받치는 거대한 법랑 욕조를 들인다. 그때부터 이 욕조는 롱소니에 집안사람들의 운명을 말없이 지켜보게 된다.

프랑스에서 칠레로 이주한 한 가족이 4대에 걸쳐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다. 롱소니에가 프랑스를 떠난 때부터 1, 2차 세계대전을 거쳐 칠레의 군부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정권이 시작된 1973년까지 100년에 걸친 역사를 담았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젊은 작가 중 하나로 꼽히는 저자의 필력이 돋보인다. 카메라로 관찰하는 듯한 촘촘한 묘사와 환상적인 문체가 번갈아 등장하며 독자들을 끌어당긴다.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평범한 개인의 삶을 통해 풀어간 점이 매력적이다. 프랑스인 후손들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프랑스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과정에선 뭉클함마저 느껴진다. 가족 구성원 각각의 풍성한 이야기가 소설이 채 담지 않은 더 많은 이야기를 상상하게 만든다.

#프랑스#칠레#이주#가족#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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