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수의 얼굴을 가려라 - 얼굴을 가린 채 포승줄에 묶인 남성들[청계천 옆 사진관]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3월 8일 1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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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사진 No. 103

● 법원으로 들어가는 피고인들의 머리에 씌워진 갓

머리에 둥근 통 같은 기구를 쓴 네댓 명의 남성들이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습니다. 1925년 3월 4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입니다.

◇ 법정에 들어가는 적기단 피고 3인/ 1925년 3월 4일자 동아일보
◇ 법정에 들어가는 적기단 피고 3인/ 1925년 3월 4일자 동아일보
네이버 옛날신문 보기로 확인하니 같은 날 조선일보에도 사진이 실렸습니다(아래 사진). 남성들 앞에서 찍은 사진이라 좀 더 분명합니다. 용수를 쓰고 있는 사람은 5명 정도 되는데 사진 설명은 3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마 지금도 비슷하지만 재판을 받으러 가는 호송 과정에는 다른 건의 범죄 행위에 연루된 피고인이 함께 움직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 적기단 사건의 피고. 앞에선 이가 이정호 다음 이문재 그 다음이 홍진의/ 1925년 3월 4일자 조선일보
◇ 적기단 사건의 피고. 앞에선 이가 이정호 다음 이문재 그 다음이 홍진의/ 1925년 3월 4일자 조선일보
남성들이 쓰고 있는 기구는 ‘용수’ 입니다. 고려대한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죄수의 얼굴을 가리는 데 쓰던 갓. 죄수를 밖으로 데리고 나갈 때 죄수의 머리에 씌웠으며, 짚으로 만든다”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박경리 작가의 소설 『토지』에도 “간수 두 명이 짐승 몰듯 몰고 나온 것은 용수를 쓰고 오랏줄에 엮은 네댓 명의 죄수였다”라는 표현이 나온다고 합니다.

항일운동 자료를 모아 둔 박물관이나 자료실 등에서 볼 수 있는, 익숙하지만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도구입니다.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안중근 의사가 사망한 중국 뤼순(旅順) 감옥에도 대나무 재질의 용수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사진 속 사람들에게는 무슨 사연이 있는걸까요? 관련 기사를 찾아보았습니다. 사진이 실린 3월 4일, 다음 날인 3월 5일 그리고 7월에 관련 기사가 있었습니다.

■적기단 사건 공판: 조직과 활동, 그리고 법정 심문

지난 3월 4일, 경성지방법원 제7호 법정에서 적기단(赤旗團) 사건 공판이 열렸다. 피고는 이정호(31), 홍진의(31), 문재(30) 세 사람으로, 이날 재판은 궁본(宮本) 재판장, 산근(山根), 이집원(伊集院) 배석판사, 그리고 리견(里見) 검사의 주재 아래 진행되었다.
이날 법정은 아침부터 많은 방청객이 몰려들어 법정이 가득 찼다. 재판이 시작되자 재판장은 피고들의 신상 정보를 확인한 후 사실 심문을 진행했다. 먼저 이정호에게 과거 전과 여부를 묻자 그는 “보안법 위반으로 한 차례 감옥에 들어간 적이 있다”고 답했다.
검사는 이정호가 중국 길림(吉林)에서 머무를 당시 적기단의 단장으로 알려진 이승(李承)과 친분이 있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에 대해 이정호는 “이승이 적기단 간부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단원으로 가입한 적은 없다”고 주장했다. 검사는 또 이승이 10년 전 함흥의 부호 고형선(高衡璿)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요구했으나, 고형선의 신고로 체포되어 5년 형을 선고받고 청진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탈옥한 사실이 있는지 추궁했다. 이에 이정호는 “그 사실은 알고 있지만, 구체적인 내막은 알지 못한다”고 답했다.
이정호는 작년 7월 박용하(朴鎔夏)로부터 이승이 고형선에게 협박장을 보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어떤 서면이 보내졌다는 말은 들었지만, 협박장인지 여부는 몰랐다”고 답했다. 검사는 또 이승이 고형선을 두고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는 증언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이정호는 “고형선의 신고로 이승과 그의 친구가 징역을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복수할 계획을 들은 적은 없다”고 해명했다.
이어 검사는 박용하가 두 사람의 갈등을 중재하려 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정호가 처음에는 10만 원을 요구했다가 점차 금액을 줄여 1만 5천 원을 요구한 사실이 있는지 물었다. 이에 대해 이정호는 “나는 금전을 요구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그러나 검사는 그가 실제로 5천 원을 받은 이유를 추궁했다. 이에 대해 이정호는 “지난해 7월 30일, 박용하를 만났을 때 고형선이 찾아와 먼저 인사를 나눈 후 5천 원을 건넸다. 그는 ‘총 1만 5천 원을 줄 테니 한 번에 지급하면 외부의 의심을 받을 수 있어 3개월에 걸쳐 5천 원씩 지급하겠다’며, 아울러 이승과의 갈등을 원만히 해결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해명했다. 또한 그는 “이 돈을 개인적으로 사용하려 한 것이 아니라, 이승에게 전달할 계획이었다”고 밝혔다.
검사는 5천 원을 받을 당시, “1만 5천 원 중 5천 원을 먼저 받았다”는 문구를 적고, ‘적기단 경리 이OO(가명)’이라는 서명을 한 사실이 있는지를 물었다. 이정호는 이를 인정하면서도, 함께 기소된 홍진의와 문재는 이 사건과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이날 재판은 일반의 안녕과 질서를 방해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일부 심문 내용에 대해 방청을 금지한 채 진행되었으며, 오후 1시 10분경 심문이 종료되었다.

■적기단 조직과 활동 내용, 그리고 검사의 구형
다음 날인 3월 5일, 재판은 계속 진행되었으며, 적기단의 조직, 활동 목적 및 계획 등에 대한 심문은 방청객 없이 비공개로 이루어졌다. 오후 6시 30분경 결심이 이루어졌으며, 변호인 측에서는 허헌(許憲), 김찬영(金瓚永), 김용무(金用茂) 세 변호사가 피고들을 변호하며 격렬한 변론을 펼쳤다. 하지만 검사는 이정호에게 징역 7년, 홍진의에게 징역 5년, 문재에게 징역 1년을 구형했다. 재판장 궁본은 최종 판결을 3월 11일에 선고하겠다고 선언한 후 재판을 마무리했다.

■예심 종료: 일부 피의자의 면소와 기소 결정
7월 28일, 적기단 사건에 연루된 피의자들에 대한 예심이 마무리되었다. 그동안 경성지방법원에서 장기간 조사를 받아온 신백우 원우관 이봉수 세 사람은 면소 처분을 받았으며, 정재달 이재복 두 사람은 유죄로 결정되어 대정 8년 (1919년) 제령(制令) 제 7조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 동아일보 1925년 3월 4일자, 3월 5일자, 7월 28일자 종합

● 당사자인 피고인들에게 ‘얼굴이 가리워진다는 것’의 의미

피고인들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용수를 보면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왜 저런 형태의 갓을 씌워 호송했을까요?

서대문 형무소와 뤼순 감옥에 전시된 용수에는 죄인들의 눈 부분에 구멍이 뚫려 있어 밖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다만,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에선 구멍이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그렇더라도 짚이나 대나무 재질의 특성상 완전 암흑은 아니고 밖의 빛이 들어오고 또 흐릿하게나마 밖을 볼 수는 있었을 것 같습니다. 호송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죄수들이 이동 중에 넘어지지 않도록 해야 하는 숙제도 있었을 테니까요. 그러면서도 밖에서는 그들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도록 하는 장치가 용수입니다.

당사자인 피고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중대 범죄 혐의를 받고 있는 죄수들의 입장에서는 사람들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게 된 상황을 다행이라고 생각할까요? 나중에 사회에 복귀할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얼굴을 가리는 것이 나을까요? 가족이나 주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좀 줄일 수는 있을까요? 얼굴은 사람의 정체성입니다. 이목구비는 살아 온 삶의 궤적과 마음에 품고 있는 이상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용수를 이용해 죄인의 얼굴을 가리면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지워집니다. 중요한 사건의 피고인들이 용수를 쓴 채 공개 장소에 드러나는 것은 개인으로서는 수치이지 않을까요? 특히 사상범과 정치범의 경우라면 얼굴을 온전히 드러내고 싶지 않았을까요?

● 공권력 입장에서 용수의 효용성

그런 점에서 용수라는 형벌 도구는 공권력의 입장에서는 힘을 과시하는 방법이었을 것 같습니다. 사상이 불손한 피고인들의 얼굴을 대중들에게 드러내지 않도록 하고 고립시키는 방식으로 용수를 씌워서 호송하는 겁니다. 피고인의 얼굴에서 드러날 수 있는 결기와 감정을 차단하면서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대중들에게 보여줌으로써 보는 사람들에게도 ‘범죄를 저지르면 이렇게 된다’는 경고를 할 수 있었을 겁니다. 질서에 순응할 것을 강요하는 장치로 활용하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과거에 있었던 용수는 단순한 형벌 도구를 넘어, 공권력이 질서유지와 정의라는 이름으로 만들어 낸 폭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설령 흉악범이라도 사법기관이 함부로 개인의 존엄을 침해하지는 않는 현대 민주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방식이기도 하구요. 오늘은 100년 전 신문에 실린, 피고인들의 호송 사진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은 사진에서 어떤 점이 보이셨나요? 좋은 댓글과 의견 부탁드립니다.

#죄수#죄수의 얼굴#백년사진#청계천 옆 사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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