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기단 사건 공판: 조직과 활동, 그리고 법정 심문지난 3월 4일, 경성지방법원 제7호 법정에서 적기단(赤旗團) 사건 공판이 열렸다. 피고는 이정호(31), 홍진의(31), 문재(30) 세 사람으로, 이날 재판은 궁본(宮本) 재판장, 산근(山根), 이집원(伊集院) 배석판사, 그리고 리견(里見) 검사의 주재 아래 진행되었다.
이날 법정은 아침부터 많은 방청객이 몰려들어 법정이 가득 찼다. 재판이 시작되자 재판장은 피고들의 신상 정보를 확인한 후 사실 심문을 진행했다. 먼저 이정호에게 과거 전과 여부를 묻자 그는 “보안법 위반으로 한 차례 감옥에 들어간 적이 있다”고 답했다.
검사는 이정호가 중국 길림(吉林)에서 머무를 당시 적기단의 단장으로 알려진 이승(李承)과 친분이 있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에 대해 이정호는 “이승이 적기단 간부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단원으로 가입한 적은 없다”고 주장했다. 검사는 또 이승이 10년 전 함흥의 부호 고형선(高衡璿)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요구했으나, 고형선의 신고로 체포되어 5년 형을 선고받고 청진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탈옥한 사실이 있는지 추궁했다. 이에 이정호는 “그 사실은 알고 있지만, 구체적인 내막은 알지 못한다”고 답했다.
이정호는 작년 7월 박용하(朴鎔夏)로부터 이승이 고형선에게 협박장을 보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어떤 서면이 보내졌다는 말은 들었지만, 협박장인지 여부는 몰랐다”고 답했다. 검사는 또 이승이 고형선을 두고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는 증언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이정호는 “고형선의 신고로 이승과 그의 친구가 징역을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복수할 계획을 들은 적은 없다”고 해명했다.
이어 검사는 박용하가 두 사람의 갈등을 중재하려 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이정호가 처음에는 10만 원을 요구했다가 점차 금액을 줄여 1만 5천 원을 요구한 사실이 있는지 물었다. 이에 대해 이정호는 “나는 금전을 요구한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그러나 검사는 그가 실제로 5천 원을 받은 이유를 추궁했다. 이에 대해 이정호는 “지난해 7월 30일, 박용하를 만났을 때 고형선이 찾아와 먼저 인사를 나눈 후 5천 원을 건넸다. 그는 ‘총 1만 5천 원을 줄 테니 한 번에 지급하면 외부의 의심을 받을 수 있어 3개월에 걸쳐 5천 원씩 지급하겠다’며, 아울러 이승과의 갈등을 원만히 해결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해명했다. 또한 그는 “이 돈을 개인적으로 사용하려 한 것이 아니라, 이승에게 전달할 계획이었다”고 밝혔다.
검사는 5천 원을 받을 당시, “1만 5천 원 중 5천 원을 먼저 받았다”는 문구를 적고, ‘적기단 경리 이OO(가명)’이라는 서명을 한 사실이 있는지를 물었다. 이정호는 이를 인정하면서도, 함께 기소된 홍진의와 문재는 이 사건과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이날 재판은 일반의 안녕과 질서를 방해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일부 심문 내용에 대해 방청을 금지한 채 진행되었으며, 오후 1시 10분경 심문이 종료되었다.
■적기단 조직과 활동 내용, 그리고 검사의 구형다음 날인 3월 5일, 재판은 계속 진행되었으며, 적기단의 조직, 활동 목적 및 계획 등에 대한 심문은 방청객 없이 비공개로 이루어졌다. 오후 6시 30분경 결심이 이루어졌으며, 변호인 측에서는 허헌(許憲), 김찬영(金瓚永), 김용무(金用茂) 세 변호사가 피고들을 변호하며 격렬한 변론을 펼쳤다. 하지만 검사는 이정호에게 징역 7년, 홍진의에게 징역 5년, 문재에게 징역 1년을 구형했다. 재판장 궁본은 최종 판결을 3월 11일에 선고하겠다고 선언한 후 재판을 마무리했다.
■예심 종료: 일부 피의자의 면소와 기소 결정7월 28일, 적기단 사건에 연루된 피의자들에 대한 예심이 마무리되었다. 그동안 경성지방법원에서 장기간 조사를 받아온 신백우 원우관 이봉수 세 사람은 면소 처분을 받았으며, 정재달 이재복 두 사람은 유죄로 결정되어 대정 8년 (1919년) 제령(制令) 제 7조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 동아일보 1925년 3월 4일자, 3월 5일자, 7월 28일자 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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