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아쉬운 4위였다. 조호성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포인트레이스(250m 트랙을 160바퀴를 돌고, 10km마다 순위를 매겨 총점으로 승자를 가리는 경주)에서 158바퀴를 돌 때까지 3위였다. 두 바퀴만 더 순위를 유지했으면 메달을 딸 수 있었으나 두 바퀴를 남기고 1점 차로 역전당했다. 조호성은 “올림픽에 오기 3주 전에 이탈리아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경쟁자들을 모두 제치고 월등하게 1등을 했다. 마음은 이미 포디움 위에 있었다”라며 “너무 설레어서 경기 전날 잠을 못 잤다. 돌이켜보면 자만심이 화를 부른 게 아닐까 싶다”라고 말했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매디슨에서 금메달을 딴 뒤 그는 경륜으로 전향했다. 아마추어 시절 중장거리 선수였던 그는 단거리를 달리는 경륜에서도 곧바로 ‘경륜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를 오랫동안 지도한 정태윤 전 대표팀 감독의 말에 따르면 “조호성은 특별하다 못해 특이한 선수”였다.
사이클과 경륜은 쓰는 근육이 다르다. 단시간에 폭발적인 힘을 내야하는 경륜 선수로서 급선무는 몸을 키우는 것이었다. 66kg이었던 몸무게를 86kg으로 만들기 위해 그는 죽을 힘을 다했다. 조호성은 “체중을 불리는 게 가장 힘들었다. 경륜 입문 후 매일 밤 고열량의 스테이크를 먹고 보충제를 먹었다. 그래도 살이 쉽게 찌지 않았다”마려 “단백질을 보충하기 위해 새벽엔 알람을 맞춰 놓고 일어났다. 그렇게 6개월을 지내고서야 서서히 체중이 늘었다. 그때부터 경기력이 좋아지면서 자신감도 생겼다”라고 했다.
‘경륜 황제’ 시절의 조호성의 모습. 동아일보 DB
경륜 선수 생활은 화려했다. 2005년부터 2007년까지 3년 연속 그랑프리 우승을 차지했다. 2004년부터 2007년까지는 4년 연속 상금왕에도 올랐다. 당시 최다이던 47연승 기록도 세웠다. 약 4년 6개월 동안의 경륜 선수 생활 동안 그는 겉에서 보기엔 한 마리 우아한 백조 같았다. 하지만 내면적으로 그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돈이 걸린 경륜이라는 종목 특성상 스트레스를 피할 수 없었다. 조호성은 “성적도 좋았고, 돈도 많이 벌었지만 정신적으로 피폐해졌다. 일요일 마지막 경주 같은 때에는 30억 원이 넘은 돈이 걸리기도 했다”며 “그런데 베팅액의 대부분이 내게 걸려 있었다. 무조건 1등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안고 타는 게 쉽지 않았다”라고 했다.
극심한 스트레스에 원형탈모가 왔다. 한두 군데가 아니라 7, 8 군데 머리가 빠졌다. 그는 “베팅에 실패한 분이 집으로 찾아오는 날도 있었다. ‘세상이 이런 욕이 다 있구나’ 싶을 정도로 다양하고 많은 욕을 먹기도 했다”라며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아야 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다시 아마추어로 돌아간 뒤 원형탈모도 씻을 듯이 나았다”고 했다.
그가 다시 아마추어로 돌아온 가장 큰 이유는 못다 이룬 올림픽 메달의 꿈에 도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어느덧 그도 30대 중반을 향해 가고 있었다. 조호성은 “나이는 30대 중반이었지만 20대와 같은 열정이 있었다. 만약 국내 팀에서 자리가 없다면 해외로 나가서 도전할 생각이었다”라고 했다. 다행히 서울시청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장거리를 달리기 위해선 다시 살을 빼야 했다. 눈물겨운 살 빼기가 시작됐다. 식단조절과 유산소, 필라테스를 병행하며 몇 개월 만에 약 20kg를 감량했다. 하지만 20대 초반 몸무게이던 65kg까지는 3kg이 모자랐다. 그는 “아마추어로 돌아온 후 최소한의 열량으로 버티며 살을 뺐다. 칼로리를 가능한 한 적게 섭취하면서 운동량은 최대한 많이 가져갔다. 살 빼기도 쉽지 않지만 찌우는 것에 비하면 훨씬 할 만했다”라며 웃었다. 그는 사이클의 본고장인 프랑스에 가서 1년간 개인 훈련을 하면서 점점 기량을 회복했다.
조호성 서울시청 감독 겸 대한사이클연맹 전무의 대회 중 모습. 조호성 제공
그가 결정적으로 재기에 성공한 대회는 2009년 사상 처음으로 서울 도심에서 열린 2009 투르 드 서울 국제사이클대회였다. 서울 광화문광장을 출발해 다시 광화문 동아일보사로 골인하는 100.5km 레이스에서 조호성은 2시간17분5초로 2위 디르크 뮐러(36·독일)를 2초 차로 따돌리고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다. 비바람이 부는 악천후 속에서 조호성은 결승선 1km 남겨두고 막판 스퍼트를 해 짜릿한 역전 우승을 일궈냈다. 조호성은 “아마추어로 복귀한 뒤 가진 첫 국제대회에서 우승하면서 다시 자신감을 찾을 수 있었다. 그 대회가 있었기에 향후 5년간 더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끝내 올림픽 메달의 꿈은 이루지 못했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후배들과 함께 팀 추월 금메달을 합작했지만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는 메달과는 더욱 멀어졌다. 그는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을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쳤다. 조호성은 “열정은 여전했지만 세월의 무게를 거스를 순 없었다. 여전히 하루에 300km를 타는 건 괜찮았다. 하지만 20대 때는 하루 자고 일어나면 회복이 됐지만 40세가 되니 더이상 되지 않더라”라고 말했다.
조호성이 서울시청 선수들을 지도하는 모습. 조호성은 선수 시절부터 지도자까지 서울시청과 함께 하고 있다. 동아일보 DB
은퇴 후 지도자로 변신한 그는 현재 서울시청 감독을 맡고 있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과 2021년 도쿄 올림픽 때는 지도자로 올림픽 무대를 밟았다. 올해부터는 대한사이클연맹 전무로 선임돼 행정가의 일도 겸하고 있다.
요즘도 그의 머리 속은 자전거 생각 뿐이다. 언젠가는 올림픽 시상대 위에 선 한국 선수를 배출하는 게 목표이자 꿈이다. 조호성은 “한강 자전거 도로 등을 보면 사이클을 즐기는 인구가 정말 많다. 하지만 자전거 인기에 비해 올림픽 메달이 없다는 게 아쉽다. 올림픽 메달이 없다 보니 그때마다 1점 차로 메달을 놓친 내 이름이 소환된다. 언젠가 좋은 후배가 나와 나를 그 굴레에서 꺼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지도자 겸 행정가로 바쁜 시간을 보내면서도 그는 현역 때 못지않은 탄탄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다. 선수들에게 배 나온 지도자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게 이유다. 봄에서 가을까지는 러닝이나 자전거를 탄다. 주말에는 8시간 안팎의 등산을 간다. 그는 “걷거나 뛸 때 생각이 많이 정리된다. 행정가 일을 맡은 요즘에는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더 운동을 하려 한다”고 했다.
한국 최고의 사이클 선수로 활동하면서 그는 많은 나라를 다녔다. 훈련과 대회 참가를 위해 가 본 나라만 50여 개국이나 된다.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나라는 세계 최고의 도로 사이클 대회인 ‘투르 드 프랑스’를 개최하는 프랑스다. 그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오랫동안 프랑스에 머물려 훈련을 했고, 다시 아마추어에 복귀한 2000년대 말에도 프랑스에서 1년 동안 훈련을 했다. 조호성은 “사이클의 천국인 프랑스에서는 곳곳에서 하루에 50개의 레이스가 열린다. 대회 수준이나 상금에 따라 내가 원하는 대회를 나가면 된다”고 했다.
향후 그의 꿈은 그가 다녔던 나라들 중 정말 좋았던 10여 개 나라에서 ‘한 달 살기’를 해보는 것이다. 조호성은 “선수나 지도자를 할 때는 호텔과 경기장 주변만 다녔다. 선수가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 여유있게 살아보는 게 버킷리스트”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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