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바닷속 난파선에서 인양한 ‘3500년 해양사’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7월 19일 0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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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부터 2차 세계대전까지… 유물 간직한 난파선 12척 소개
로마제국 선박에선 항아리 발견… 북아프리카서 올리브유 등 옮겨
수술도구도 나와 의사 탑승 추정
◇바다가 삼킨 세계사/데이비드 기빈스 지음·이승훈 옮김/516쪽·2만5000원·다산초당

저자가 로마제국 시대 난파선에서 암포라(항아리)를 끌어올리고 있는 모습. 온전한 암포라 한 점을 비롯해 토기 오일 램프, 주방용 및 식사용 토기, 청동으로 된 외과용 메스 등이 발굴됐다. 사진 출처 데이비드 기빈스 홈페이지
저자가 로마제국 시대 난파선에서 암포라(항아리)를 끌어올리고 있는 모습. 온전한 암포라 한 점을 비롯해 토기 오일 램프, 주방용 및 식사용 토기, 청동으로 된 외과용 메스 등이 발굴됐다. 사진 출처 데이비드 기빈스 홈페이지
콜로세움, 판테온, 세베루스 개선문, 공화정 시대 포룸의 신전과 법정…. 이탈리아 로마를 찾는 관광객들이 사진을 가장 많이 찍는 고대 로마 유적지들이다. 하지만 유적은 대륙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또 다른 역사의 진실을 품고 있는 곳이 있으니, 바로 바다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고고학 박사학위를 받고 45년 넘게 바다와 연구실을 오간 수중 고고학자인 저자가 각 시대를 풍미한 난파선 12척을 중심으로 3500년 해양사를 집대성한 책이다. 고대 로마의 포도주 무역, 중세의 기독교 신앙 전파, 대항해시대의 식민지 확장, 제2차 세계대전의 전투 등에 이르기까지, 바다 밑에서 발견한 역사의 조각을 인양해 독자 앞에 가져다 놓는다.

로마제국 위정자들이 지도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안정적인 식량 배급이 필수였다. 로마는 북아프리카를 ‘로마의 빵 바구니’로 삼아 식량과 올리브유를 실어날랐다. 이를 보여주는 증거가 바다에서 발견됐다.

플렘미리오 난파선은 로마제국 전성기에 진수된 것으로 추정되는 선박. 1953년 지중해 플렘미리오 절벽에서 발견됐다. 발견 당시 절벽과 바위에는 암포라(로마 시대 널리 쓰인 항아리) 파편들이 대거 발굴됐다. 특히 올리브유를 담았던 암포라가 눈길을 끌었다.

난파선에서 출토된 유물들.
난파선에서 출토된 유물들.
난파선에서 발견된 암포라는 각각 40∼80L의 올리브를 담을 수 있었다. 손잡이에는 장원 소유주의 이름과 화물의 무게, 화주 이름이 찍혀 있었다. 고도의 품질 관리와 규제가 이뤄졌다는 걸 보여주는 증거다. 플렘미리오 절벽에서 침몰한 이 선박은 로마제국을 지탱한 경제 구조를 조명하는 근거가 되는 셈이다.

플렘미리오 난파선에선 전문 외과의가 탑승했음을 알려주는 유물도 발견됐다. 해저 골짜기 아래 퇴적물에서 끝부분이 버드나무 잎사귀 모양인 길이 7cm의 가느다란 청동제 도구를 발견했다. 고대 난파선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수술용 칼 손잡이’였다. 일각에선 이를 토대로 고대인이 백내장 수술을 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저자는 선사시대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각 시대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12척의 난파선을 연대기 순으로 소개한다. 특히 절반 이상은 그가 직접 발굴했거나 잠수해 살펴봤던 것이어서 마치 현장에 함께 있는 듯 생생하다.

저자는 가장 어려웠던 탐사 중 하나로 ‘로열 앤 갤리’호를 찾아 들어간 잠수를 꼽았다. 1708년 진수된 영국 해군 전투함으로, 영국 최남단 리저드 포인트 근해에 가라앉아 있다. 이곳 조류는 하루에 두 번씩 위험한 소용돌이와 역류를 형성해, 길을 잘못 들어 물길에 몇 m만 더 가까워져도 목숨이 위험하다. 잠수 시간을 잘 측정해서 물결이 닥치기 전에 반드시 돌아와야만 했다. “이곳에서 로열 앤 갤리호 희생자뿐 아니라 다른 수많은 난파선 조난자들이 익사했다”는 저자의 말에서 심해로 뛰어드는 연구자의 집념과 투지가 엿보인다.

지구의 바다와 호수에는 기록된 것만 25만 척, 추정치로는 300만 척 이상이 가라앉아 있다고 한다. 수천 년 동안 인류 문명은 바다를 가로지르며 움직였고, 그곳에서 치열한 전투도 벌여왔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역사는 ‘땅 위의 문명’에 집중돼 왔다. 바다에 어떤 비밀이 숨어 있는지는 여전히 베일에 싸여 있다.

난파선에서 발견된 물건들은 침몰된 그 순간 사용됐던 문화유산들이어서 꽤 정확한 연대 측정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저자는 난파선들을 “각자의 시대를 담은 소우주”라고 표현한다. 새로운 관점으로 깊은 우주를 탐구하고 싶은 이들에게 제격인 책이다.

#고대 로마#난파선#플렘미리오#암포라#수중 고고학#해양사#로열 앤 갤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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