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재난의 잔해에서 찾았다, 삶을 복구하는 법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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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 ‘힐스버러 압사 사고’ 겪은 후 재난 복구 전문가로 살아온 저자
9·11테러-인도양 지진해일 등 20여 년간 참사 현장 지킨 기록
유가족 마음 어루만질 수 있도록 유류품 전달 상자도 고심해 골라
◇먼지가 가라앉은 뒤/루시 이스트호프 지음·박다솜 옮김/364쪽·2만2000원·창비

‘먼지가 가라앉은 뒤’는 20여 년간 세계 곳곳의 재난 현장을 누빈 재난 복구 전문가의 에세이다. 저자는 민간 재난 복구 서비스 기업인 ‘케니언 인터내셔널 응급 서비스’에서 일을 시작해 9·11테러 현장을 포함한 여러 재난 현장을 지켰다. 저자는 “재난이 존재하는 한, 피해자를 도우려 재난 현장으로 달려가는 사람들 역시 존재할 것”이라고 했다. 사진은 9·11테러 현장에서 빠져나오고 있는 생존자의 모습.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먼지가 가라앉은 뒤’는 20여 년간 세계 곳곳의 재난 현장을 누빈 재난 복구 전문가의 에세이다. 저자는 민간 재난 복구 서비스 기업인 ‘케니언 인터내셔널 응급 서비스’에서 일을 시작해 9·11테러 현장을 포함한 여러 재난 현장을 지켰다. 저자는 “재난이 존재하는 한, 피해자를 도우려 재난 현장으로 달려가는 사람들 역시 존재할 것”이라고 했다. 사진은 9·11테러 현장에서 빠져나오고 있는 생존자의 모습. 사진 출처 위키미디어

1989년 4월 15일 토요일. 영국 셰필드에서 리버풀 FC 대 노팅엄 포리스트 FC의 FA컵 준결승전이 열렸다. 당시 힐스버러 스타디움의 입석 구역에 수천 명이 한꺼번에 밀려들며 압사(壓死) 사고가 벌어졌다. 역사에서 ‘힐스버러 참사(Hillsborough disaster)’로 기록된 이 사고로 97명이 목숨을 잃고 766명이 다쳤다.

참사가 벌어진 뒤 리버풀은 도시의 일상이 바뀌었다. 초등학생들은 몸을 겹쳐 쌓는 이른바 ‘힐스버러 놀이’를 했다. 시민들은 책임을 회피하는 경찰과 정부에 항의하며 거리에서 진상 규명을 위한 구호를 외쳤다.

이 사건은 당시 열 살이었던 저자를 ‘재난 복구 전문가’로 이끈 중요한 계기가 됐다. 참사 후폭풍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그의 아버지가 “누구든 해결을 해야지”라고 혼잣말을 했는데, 그 말이 어린 마음에 깊이 박혔다.

책은 20년 넘게 재난 복구 전문가로서 세계 곳곳의 현장을 누빈 저자의 기록들을 모았다. 9·11테러, 인도양 지진해일 등 여러 대형 참사 현장을 경험한 이답게 생생한 묘사와 깊은 성찰이 담겼다.

저자는 자신을 “계단 밑을 청소하는 신데렐라 같은 존재”라고 표현한다. 재난 복구 전문가의 역할은 시신을 수습하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망자의 신원을 파악하는 일부터 유류품을 어떤 상자에 담아 전달할지 정하는 일까지 보이지 않는 여러 부분을 담당한다. 더 나아가 다시 닥칠 재난을 대비해 기업이나 정부 등과 함께 사회 시스템을 점검하기도 한다.

이 모든 과정에 관여하는 저자가 특히 경계하는 건 “일을 단순하게 처리하고자 하는 유혹”이다. 그는 “재난 상황에서 죽음은 오랜 시간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찾아온다”며 “작은 디테일이 얄궂게도 유가족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를 주는지, 직접 그런 상실을 겪어보기 전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이 책엔 한국 사례가 소개되진 않았다. 하지만 숱한 재난을 목격해 온 한국 독자들은 자연스레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등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특히 2005년 런던 지하철 역사에서 벌어진 7·7테러 현장을 묘사한 대목은 한국의 참사 현장과 무척 닮았다. 13명이 희생된 이 사건 현장에서 마주한 유류품 가운데 저자의 기억에 가장 오래도록 남은 건 당일 발송된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들이었다. 다툼의 한가운데에, 새로운 연애가 시작되던 찰나에, “무슨 차 마실래?” 묻던 도중에 급작스럽게 끝이 난 대화들. 별것 아닌 듯 문자를 보냈던 단원고 학생들이 떠올라 울컥해진다.

매 순간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직업의 대가는 때로 가혹하다. 재난업계 종사자들에게 가장 힘든 일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한다. 기념일 데이트로 간 공연 화장실에서 안치소의 세척 용액향을 맡을 때, 집 안에 굴러다니는 펜에 손을 뻗다가 현장에서 본 유류품과 같은 브랜드라는 걸 알아차릴 때 그들은 그 순간 곤두서는 신경을 다독여야 한다. “어디서나 죽음과 삶과 상실의 냄새가 난다”는 저자의 말처럼 이들에게 일상을 보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 돼 버린다. 그럼에도 저자는 여전히 묵묵히 현장으로, 안치소로 향한다.

“시간을 돌려 그 아이(과거의 자신)를 만날 수 있다면 ‘네가 모든 걸 해결할 순 없다’고 말해주고 싶다. 하지만 그 여정 자체에 의미가 있을 거라고도 알려주고 싶다. 네가 누군가에게 준 자그마한 도움 하나가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고. 혹독한 시간을 겪는 누군가에게 안심이 되는 미소를 건네는 일에는 가치가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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