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임원 교육 참석자들에게 주어진 크리스털 패. 과거 회식 건배사 등에 쓰였던 삼성인에 대한 문구가 쓰여 있다.
삼성전자가 지난 10년 동안 ‘사법 리스크’에 시달리는 동안 삼성전자 안팎의 경영 환경은 급변했다. 우선 인공지능(AI)을 둘러싼 글로벌 빅테크 경쟁이 거세졌다. 반도체에선 차세대 먹거리인 고대역폭메모리(HBM) 주도권을 SK하이닉스에 내줬다. 스마트폰과 가전에선 중국 업체들의 거센 추격을 받고 있다.
최근 삼성이 골머리를 싸매고 있는 대표적인 분야가 반도체다. 절대적인 기술 우위를 바탕으로 경쟁 업체들을 ‘초격차’로 눌렀던 과거 삼성 반도체의 모습은 이제 보기 어려워졌다. 경쟁사 SK하이닉스는 미국 엔비디아에 5세대 HBM3E의 핵심 공급업체 역할을 맡으면서 주도권을 확보했다. 심지어 범용 메모리 반도체에서도 중국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의 맹렬한 추격으로 위협을 받는 상황이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반도체 시장은 PC가 보급될 때 한 번, 스마트폰이 나왔을 때 한 번, 이제 AI 시대를 앞두고 다시 한 번 성장이 기대된다”며 “그런데 현재 SK하이닉스가 HBM 기술 리더십을 가지고 있어 삼성전자로서는 위기인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미래 먹거리로 꼽혔던 시스템 반도체에서도 고전을 거듭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2019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를 포함한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 2030년까지 글로벌 1위에 오르겠다고 선언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삼성전자가 선두 탈환을 노렸던 파운드리 부문은 대만 TSMC의 점유율이 지난해 4분기(10∼12월) 67.1%에 이르렀다. 2위인 삼성전자는 8.1%에 머무르며 이제는 TSMC와의 격차가 59%포인트까지 벌어졌다.
심지어 삼성전자가 올해 새로 출시한 최신 스마트폰 ‘갤럭시 S25’의 두뇌에 해당하는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는 삼성 엑시노스가 아닌 퀄컴 스냅드래건이 단독 채택되기도 했다. 이른바 ‘기술의 삼성’ 입장에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일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가 이런 상황을 맞이한 것은 장기 사법 리스크의 영향이 작지 않다는 게 재계의 시각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지난달 항소심에서 무죄가 나온 ‘삼성물산-제일모직 부당 합병’ 재판에서 1, 2심 합쳐 4년 5개월 동안 총 102차례 법정을 오갔다. 2주에 한 번꼴로 법정을 오가다 보니 경영에 집중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TSMC나 애플 등은 최고경영자(CEO)가 계속 법정에 불려 다니는 수준의 ‘사법 리스크’는 겪지 않았다”며 “이 시기 시장 상황에 맞는 과감한 투자와 인재 배치가 가능해져 이들 기업이 앞서 나갈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재판 때문에 이 회장의 등기이사 복귀가 미뤄지다 보니 책임 경영이 이뤄지지 않고, 이사회의 주요 경영 결정에서 한발 물러나 있는 문제도 지적되고 있다. 등기이사가 아닌 만큼 회사 경영에 세밀하게 관여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조명현 고려대 경영대 교수는 “검찰의 상고로 (이 회장에 대한) 사법 리스크가 이어지고 있다”며 “법원도 경제 상황을 고려해 선고를 빠르게 내려야 기업의 불확실성이 걷힐 것”이라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