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피스’ 깃발 든 젠지 시위 물결… 亞 넘어 아프리카-남미로 확대[글로벌 포커스]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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亞 국가들 정권교체 태풍 된 Z세대 분노
네팔 실업률 20.8%, 경제난 심각… 부자-형제 등 세습 정치 이어져
인구 비율 높은 청년층서 분노… 日 애니 등 대중문화 활용해
공감대 쌓고 풍자 효과까지… SNS로 다른 국가 확산도
“‘아랍의 봄’과 비슷하게 대안세력 없어 한계”

지난달 3일(현지 시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반정부 시위에 일본 애니메이션 ‘원피스’에 나오는 해적 깃발이 등장했다. 이 깃발은 아시아 국가들의 젠지 시위에서 저항의 상징으로 쓰였다. 자카르타=AP 뉴시스
“우린 월드컵 대신 병원이 필요하다.”

북아프리카의 아랍 국가인 모로코에서 지난달 27일(현지 시간)부터 청년들이 주도해 시작된 반정부 시위가 2일까지 계속되며 3명이 숨졌다. 수도 라바트를 비롯해 다른 주요 도시로도 시위가 번지는 가운데 시위대는 더 나은 학교와 병원을 요구하고 있다. 또 아지즈 아카누시 총리의 사임을 촉구하고 있다. 모로코는 스페인, 포르투갈과 공동으로 ‘2030 월드컵’을 개최한다. 이를 위해 경기장 건설에 수십억 달러를 투입하고 있는데, 열악한 보건의료 인프라와 공공 서비스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은 더욱 커지고 있는 것. AP통신은 이번 시위의 원인을 이같이 진단하며, 참가자 70%가 10대 미성년자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또 올 7월부터 본격화한 아시아권의 반정부 시위와 닮은꼴이라고 분석했다.

최근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등으로 번지는 반정부 시위들의 공통점은 젊은 층이 주축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최근 아시아에서 시작된 청년 주도 반정부 시위를 ‘젠지(GenZ·Z세대·1995∼2010년 출생자) 혁명’이라고 명명했다. 또 경제난과 부패, 그리고 권위주의에 대한 젊은 층의 분노가 시위의 원동력이라고 진단했다.

이 과정에서 청년들이 즐겨 사용하는 소셜미디어는 이들의 불만을 표현해 확산시키고, 시위를 조직하는 강력한 도구가 됐다. 일각에서 이번 젠지 혁명을 2010년대 초 튀니지, 이집트, 리비아, 예멘 등 중동 아랍권 국가들에 들불처럼 번진 ‘아랍의 봄’에 비견하는 이유다.

젠지 반정부 시위 확산

2025년 9월 25일~현재 : 모로코, 마다가스카르, 파라과이 등 시위
(아프리카, 남미 대륙 등 확산)
2025년 9월 15~17일 : 동티모르 시위
(의원 차량 지급 계획에 분노, 정부 차량 구매 계획 철회)
2025년 9월 12~21일 : 필리핀 시위
(홍수예방 사업 부패에 항의, 부패 의혹 조사 약속)
2025년 9월 8~13일 : 네팔 시위
(소셜미디어 접속 차단 계기, 샤르마 올리 총리 사임)
2025년 8월 26일~9월 5일 : 인도네시아 시위
(국회의원 특혜 계기로 시위 촉발)
2024년 7~8월 : 방글라데시 시위
(독립유공자 일자리 할당제에 분노, 셰이크 하시나 총리 사임 후 인도 도피)
2022년 3월 말~7월 말 : 스리랑카 시위
(연료 및 식량 부족, 라자팍사 가문 장기집권 불만이 원인, 고타바야 라자팍사 대통령 사임 후 망명)


● 경제난과 지도층 특권에 성난 청년층이 시위 주도

지난달 9일 네팔 수도 카트만두에서 반정부 시위대가 정부 부처가 모여 있는 청사를 불태운 뒤 환호하고 있다. 시위는 네팔 정부의 소셜미디어 차단 조치로 촉발됐다. 카트만두=AP 뉴시스
젠지 혁명이 처음 불붙은 아시아 국가들은 인구에서 청년층 비율이 높고, 중위연령(모든 인구를 나이순으로 줄 세웠을 때 가운데 위치한 나이)이 낮다는 공통점이 있다. 유엔이 2023년에 집계한 중위연령은 네팔 24.6세, 방글라데시 25.3세, 인도네시아 29.8세, 스리랑카 32.8세다. 이른바 2030세대가 인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이들의 목소리가 사회 전반을 흔들 수 있는 구조인 셈이다. 또 경제난으로 청년 실업이 급증하는 가운데서도 이에 대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는 국가 지도층에 대한 분노가 커지고 있다는 공통점도 있다.

실제로 인도네시아에서는 특권층의 특혜가 시위를 촉발했다. 올 8월 하원의원 580명이 주택 수당으로 1인당 월 5000만 루피아(약 430만 원)를 받은 사실이 알려졌는데, 이는 자카르타 지역 월 최저임금의 약 10배다. 시위 도중 20대 오토바이 배달 기사가 경찰 장갑차에 깔려 숨지면서 시위가 확산됐다. 이에 프라보워 수비안토 대통령은 스리 물랴니 인드라와티 재무장관과 부디 구나완 정치법률안보 조정장관 등 핵심 각료 5명을 경질했다.

네팔에선 젊은 층이 민감해하는 소셜미디어 차단이 시위에 불을 질렀다. 지난달 5일 정부가 잘못된 여론을 조장한다며 유튜브, 페이스북 등 26개 소셜미디어를 차단한 것. 전국으로 시위가 확산되면서 51명이 숨지고 1300명이 다쳤다. 분노한 일부 시위대는 의회, 대통령실, 친정부 언론사를 습격하기도 했다. 결국 샤르마 올리 총리가 소셜미디어 차단을 해제한 뒤 스스로 물러났다. 네팔은 청년층 상당수가 관광업으로 생계를 이어 왔는데, 코로나19로 관광수익이 급감하며 민심이 악화된 상태였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지난해 네팔의 청년실업률은 20.8%에 달한다.

동티모르 역시 사회 지도층의 특혜가 문제가 됐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동티모르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454달러(약 204만 원)에 불과하다. 그러나 정부가 약 58억 원을 들여 의원 65명에게 새 차를 지급하려 하자 2000여 명의 대학생들이 반발하며 시위를 벌였다. 전직 의원들도 재직 당시 급여만큼 평생 연금을 받는다는 사실도 분노를 일으켰다. 시위대는 지난달 15일부터 사흘간 공공기관을 파손하고 정부 차량에 불을 지르는 등 격렬하게 맞섰다. 결국 동티모르 의회는 새 차 지급 계획을 철회하고, 의원 종신연금을 폐지키로 했다.

각각 2022년 9월과 지난해 7월 대규모 소요 사태를 경험한 스리랑카와 방글라데시도 심각한 경제난을 경험하고 있는 나라다. 스리랑카는 2022년 당시 고타바야 라자팍사 대통령의 실정으로 국가부도 위기에 놓이자, 청년층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반정부 시위가 불붙었다. 그 결과 라자팍사 대통령이 몰디브로 도피하며 정부가 붕괴됐다. 이후 좌파 인민해방전선(JVP) 소속의 아누라 디사나야케 대통령이 지난해 집권해 정권 교체를 이뤘다.

방글라데시에선 독립유공자 자녀를 위한 정부 일자리 할당제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이 시위를 주도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과잉 진압에 나서면서 시위 규모가 더 커졌다. 결국 15년간 집권한 셰이크 하시나 총리가 사임하고 인도로 도피했다.

● 세습정치에 부정부패 겹치며 반발 폭발

지난달 21일 필리핀 마닐라 동쪽 교외에서 수천 명의 시민들이 반정부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마닐라=AP 뉴시스
젠지 세대는 세습 등 특권에 대한 반감이 다른 세대보다 큰 편이다. 최근 반정부 시위가 확산된 필리핀은 정치 가문 중심의 권력 구조가 공고하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은 1986년 민중혁명으로 축출된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의 아들이다. 부통령인 사라 두테르테는 전임 대통령 로드리고 두테르테의 딸. 소수의 정치 명문가들이 권력을 나눠 가지면서 부패의 고리가 끊어지지 않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필리핀에선 지난달 21일 홍수 방지 기반시설 사업에서 불거진 대규모 부패 의혹이 최소 20개 도시에서 동시다발 시위를 불러일으켰다. 수도 마닐라의 루네타 공원에서 열린 집회에는 최소 4만9000명이 참여했다. 필리핀학생연맹 등 청년 단체들이 공동 주최한 이날 시위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계엄령을 선포한 지 53년이 되는 날 열렸다. 세습과 부정부패에 대한 반감이 복합적으로 반영된 것. 마닐라 집회에 참석한 학생 운동가 알테아 트리니다드는 AP통신에 “우리는 가난에 허덕이면서 집과 미래를 잃어가는 동안 지배층은 세금으로 호화 차량과 해외여행을 누리며 막대한 부를 챙기고 있다”고 비판했다.

필리핀은 태풍 등으로 홍수 피해가 잦은 국가다. 2023년부터 현재까지 9800건이 넘는 홍수 예방 사업에 6160억 필리핀페소(약 15조 원)를 투입했다. 그러나 정부 조사 결과 일부 시설은 부실 시공되거나, 아예 착공조차 되지 않았다. 랠프 렉토 재무장관은 이로 인한 경제 손실을 423억∼1185억 필리핀페소(약 1조300억∼2조8800억 원)로 추산했다.

여기에 필리핀 상원 청문회에서 건설사 사주 부부가 마틴 로무알데스 하원의장을 포함한 하원의원 17명에게 뇌물을 줬다고 폭로하면서 파문이 일었다. 마르코스 대통령의 사촌이자 실세인 로무알데스 하원의장은 결국 사임했다. 앞서 프랜시스 에스쿠데로 상원의장도 홍수 예방사업 계약 업체와의 연관설이 제기되면서 교체됐다.

다른 아시아 국가들도 상황은 비슷하다. 스리랑카는 마힌다 라자팍사 전 대통령(2005년 11월∼2015년 1월 재임)과 그의 동생 고타바야 전 대통령(2019년 11월∼2022년 7월 재임) 집권 기간 족벌정치 비판을 받았다. 두 형제 대통령은 국회의원, 농업장관 등을 역임한 D A 라자팍사의 아들이다. 두 사람은 스리랑카 정부군과 타밀 반군 간 내전을 종식했지만, 정부 요직에 친인척과 측근을 앉히며 권위주의 통치를 이어갔다.

방글라데시는 하시나 전 총리가 1971년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을 이끈 초대 대통령 셰이크 무지부르 라만의 딸이다. 하시나는 5번이나 총리직을 맡아 장기 집권하는 동안 야당 탄압 및 부정부패 비판을 받았다. 폴 스타니런드 미국 시카고대 정치학과 교수는 캐나다 공영방송 CBC에 “경제 침체 속에서 부패하고 무능하다고 여겨지는 정치 엘리트가 아시아에서 반발을 확산시켰다”며 “각국에서 반발이 정부를 무너뜨릴 만큼 강력했다”고 말했다.

● 소셜미디어, 대중문화 상징 통해 공감대 확산

아시아 각국에서 청년 세대가 주도한 반정부 시위가 확산된 배경에는 소셜미디어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분노가 빠르게 확산됐고, 특히 대중문화적 상징을 활용해 청년들의 참여를 유도했다는 것이다. 소셜미디어를 통한 의사소통은 젠지 세대의 문화적 특징이기도 하다.

특히 네팔에선 소셜미디어가 금지되기 몇 주 전부터 정치인 자녀들이 고급 자동차나 명품 가방, 해외 휴가를 즐기는 영상이 확산됐다. 1인당 GDP가 1400달러(약 190만 원)에 불과한 네팔에서 이 같은 영상은 공분을 일으켰다. 네팔 시위에 참가한 법대생 안잘리 샤(24)는 FT에 “정치인 자녀들이 호화 생활을 자신들의 소셜미디어에 과시하는 동안 우리는 안전한 식수도, 일자리도 없이 살았다”고 말했다.

젠지 세대가 소셜미디어에서 대중문화 코드를 통해 공감대를 넓히는 현상도 주목할 만하다. 인도네시아에선 일본 애니메이션 ‘원피스’에 나오는 밀짚모자 해적단의 깃발이 반정부 시위의 상징이 됐다. 원피스는 주인공 루피가 동료들과 함께 폭압적인 지배 권력에 맞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일본은 물론이고 동남아 등 해외에서도 인기를 누렸다.

원피스 깃발은 수비안토 대통령이 올 7월 말 독립기념일을 맞아 국기 게양을 촉구한 뒤 더욱 확산됐다. 해적단 깃발은 부패하고 억압적인 통치자에게 맞선다는 의미가 부여돼 젠지 세대로부터 큰 공감을 얻었다. 인도네시아 수라바야의 주민은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에 “국가를 싫어해 국기 대신 원피스 깃발을 게양한 게 아니다”라며 “엘리트를 편애하고 서민을 무시하는 공직자들의 행동과 정책에 실망한 사실을 보여 준 것”이라고 말했다.

애니메이션 등을 차용한 행동은 정치적 탄압에서 상대적으로 안전할 수 있고, 젠지 세대로부터 호응을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또 풍자 효과도 크다. 안드레아 호르빈스키 미 버클리대 연구원은 CNN에 “(원피스 주인공) 루피는 좌절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인물이다. 주인공이 집념을 보여 주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시위와 무관치 않다”고 했다.

앞서 2020년 태국 반정부 시위에선 할리우드 영화 ‘헝거게임’에 나오는 세 손가락 경례가 저항의 상징으로 사용됐다. 이 경례는 영화에서 억압적 정권에 대한 연대와 저항을 의미한다. 태국 시위자들은 왕실과 군부를 비판하며 이 제스처를 사용했고, 이는 미얀마로도 확산됐다. 2021년 미얀마 군부 쿠데타 이후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시위대가 같은 경례를 사용하며 군부독재에 저항했다.

● 아프리카, 중남미로도 젠지 시위 확산

최근 젠지 시위는 아시아를 넘어 아프리카, 중남미로도 확산되는 양상이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각국의 시위 장면 영상이 퍼지면서 다른 대륙으로 영향력이 전파되고 있는 것. 네팔 시위 참가자인 야티시 오자(25)는 “우리는 스리랑카와 방글라데시 시위에서 처음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동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에선 젠지 세대를 중심으로 지난달 25, 26일 정전 및 단수에 항의하는 시위가 수도 안타나나리보 등에서 벌어졌다. 이 시위에도 원피스 해적단 깃발이 등장했다. 시위가 격화하자 안드리 라조엘리나 마다가스카르 대통령이 내각 해산을 밝히며 수습에 나섰다.

모로코에서는 ‘Z세대 212’라는 이름으로 소셜미디어를 통해 구성된 청년 단체들이 교육과 의료 서비스 개선을 요구하며 시위를 주도하고 있다.

중남미 파라과이에서도 지난달 대학생을 중심으로 청년들이 ‘우리가 99.9%다’라는 구호 아래 공공 서비스 부실 및 일자리 부족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여기서도 젊은 층으로 구성된 시위대가 원피스 해적단 깃발을 들고 나와 눈길을 끌었다. 페루에서도 지난달 수도 리마를 중심으로 연금 가입 의무화와 고용 불안정에 항의하는 청년층 주도 시위가 벌어져 경찰관과 기자 등 최소 19명이 다쳤다. 두 나라 모두 청년들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부패와 결핍을 방관하지 말자”는 의견을 교환하며 거리로 나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AP통신은 “젠지 시위가 단순한 항의에서 불공정한 국가 체제를 공격하는 운동으로 확대되고 있다”고 평했다. 반면 젠지 세대 시위가 구심점이 없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인도 작가 미나 칸다사미는 뉴욕타임스(NYT)에 “2010년에 트위터(현 X)가 아랍의 봄을 촉발했다면, 오늘날 아시아에선 인스타그램과 틱톡이 그 역할을 하고 있다”면서도 “아랍권에서 분노를 대안으로 조직할 만한 리더십이 없었던 것처럼 아시아 젠지 시위도 비슷한 한계가 있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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