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적 적자에 트럼프 방위비 압박까지… ‘나랏빚’ 늪 빠진 유럽[글로벌 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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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 기미 안 보이는 유럽 재정위기
佛, GDP 대비 재정적자 비중 증가… 마크롱 긴축 시도에 반정부 시위도
英, 부채 우려 따른 국채금리 급등… 獨, 연속 역성장에 실업률 치솟아
고령화 등 여파로 복지 지출 급증… 트럼프 방위비 증액 압박도 ‘난제’
反이민-긴축 포퓰리즘 정당 득세… 위기 해결 어려워져 악순환 패닉

18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긴축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마크롱 대통령 퇴진’을 주장하는 대형 펼침막을 들고 도심을 행진하고 있다. 이날 시위를 주도한 철도, 의료, 교원 노조들은 프랑스 전역에서 약 100만 명이 시위에 참가했다고 추산했다. 파리=유근형 특파원 noel@donga.com
“마크롱은 프랑스의 재앙이다. 빨리 물러나야 한다.”

18일(현지 시간) 프랑스 파리의 바스티유 광장.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추진하는 긴축 재정안에 반대하는 대규모 반(反)정부 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건축업에 종사한다는 파리지앵 다니엘 레방트 씨는 ‘세금은 부자에게’라는 손팻말을 들고 이날 시위에 참여했다. 그는 기자에게 공휴일 및 복지 혜택 축소를 통해 재정적자를 줄이겠다는 정부 정책에 강한 불만을 표하며 “마크롱 정권은 우리의 체제를 파괴하고 서민 금고를 턴 도둑”이라고 일갈했다.

이날 시위는 철도, 의료, 교원 등 프랑스 주요 노조가 주도했다. 바스티유 광장에만 약 6만 명이 모였고 프랑스 전역에서는 100만 명이 거리로 나왔다고 주최 측은 추산했다. 앞서 10일에도 프랑스 전역에서 “모든 것을 차단하라(block everything)”는 시위가 벌어진 데 이어 시위가 날로 거세지고 있다.

집회 현장에서 만난 강성 노조 ‘노동총동맹(CGT)’ 스미나 스나치 사무총장은 마크롱 정권의 감세 정책이 재정적자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마크롱 정권은 가장 가난한 사람의 주머니에서 돈을 빼앗아 가장 부유한 사람에게 주고 있다. 세금은 부자들에게 더 걷어야 하고, 모든 긴축 조치도 중단해야 한다”고 외쳤다.

재정적자 감축을 위해 긴축을 추진하는 정부와 이에 반발하는 국민의 모습은 프랑스뿐 아니라 영국, 독일 등 유럽 주요국에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 3월 ‘유럽의 장기 재정 지출 압력’ 보고서에서 유럽 주요국이 모두 △고령화에 따른 의료 지출 증가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압박과 러시아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국방비 증가 △기후위기 대응 비용 △국채 금리 상승에 따른 차입 비용 상승 등에 공통적으로 직면해 있다고 지적했다. 또 IMF는 유럽연합(EU) 차원에서 국방, 에너지, 기후위기 대응에 공동으로 나서야 재정 부담을 줄일 수 있지만 각국의 이해관계가 달라 쉽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방만한 재정 운용으로 누적된 적자 규모가 클 뿐 아니라 성장률 둔화, 고령화에 따른 복지 예산 부담 같은 문제도 심각해지고 있다. 이 와중에 유럽에 ‘안보 자강’을 압박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재집권으로 국방비 지출도 대폭 늘려야 하는 상황이다. 말 그대로, 국가 부채를 줄이기 어려운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타개할 뾰족한 수가 없다는 점 또한 우려를 더한다. 유럽 주요국의 재정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지, 이에 따른 정치 사회적 혼란은 어떤지를 짚어 본다.

● 佛, 총리 사퇴에 반정부 시위 지속

최근 재정 위기 속에 가장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나라는 단연 프랑스다. 마크롱 정권의 긴축 재정에 대한 불만이 커지며 8일에는 관련 정책을 주도했던 프랑수아 바이루 전 총리가 야권의 반발에 따른 의회 불신임으로 사퇴했다.

이 과정에서 에리크 롱바르 재무장관은 독일에 이은 EU 2위 경제대국 프랑스가 IMF의 구제금융을 받을지 모른다는 위기론을 제기했다. 실제로 국제신용평가사인 피치는 재정 위기와 이로 인한 정치 혼란 등을 이유로 12일 프랑스의 국가신용등급을 기존 ‘AA―’에서 ‘A+’로 한 단계 낮췄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제경제 전문 웹사이트 CEIC 등에 따르면 지난해 프랑스의 재정적자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5.8%에 달한다. EU 평균(3.2%)의 약 두 배다. EU는 회원국들에 재정적자를 GDP의 3% 이내로 맞추라고 권고하고 있지만 이를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국가 부채 또한 3조3500억 유로(약 5463조4000억 원)다. 올 1분기(1∼3월)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GDP의 107%에 이른다. 국가 부채가 GDP의 100%가 넘는다는 것은 전 국민이 1년간 번 돈을 모두 투입해도 빚을 갚지 못한다는 뜻이다. 국채 발행에 따른 연간 이자 비용만 580억 유로(약 94조6000억 원)로 추정된다. 교육, 국방 예산 등보다 많다.

재정 상황이 이토록 악화된 건 비대한 정부 지출 때문이다. 연금, 건강보험, 실업수당 등 복지 지출이 정부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23.4%로 핀란드(25.7%), 스웨덴(25.0%) 등과 함께 유럽 최고 수준이다.

프랑스는 1970년대 오일쇼크 이후 정년 하향, 노동시간 단축, 최저임금 인상 등 사회복지 수준을 크게 높였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2010년 남유럽 재정위기 때는 정부 지출 확대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부양책을 폈다.

문제는 고령화 여파로 지출은 늘고 세수는 감소하면서 이런 확장 재정을 지속하기 어려워졌다는 데 있다. 2017년 집권한 마크롱 대통령은 소득세, 법인세 인하 등 감세 정책을 고수했다. 세수가 부족해진 상황에서 코로나19 팬데믹, 우크라이나 전쟁 등이 발발하자 식료품 및 에너지 가격 등이 치솟았다.

이로 인해 국민들의 살림살이가 팍팍해지자 확장 재정을 주장하는 극우·극좌 정당의 인기가 동시에 치솟고 중도우파 마크롱 정권의 입지는 날로 좁아지고 있다. 바이루 전 총리, 그의 전임자 미셸 바르니에 전 총리는 모두 공휴일 축소, 연금 동결, 의료 예산 감축 등을 골자로 하는 긴축 재정을 추진했다 총리직에서 쫓겨나야 했다.

● 英 ‘탄광 속 카나리아’ 위기

이웃 영국의 상황도 좋지 않다. 이달 초 30년 만기 국채 금리가 1998년 이후 27년 만의 최고치인 5.7%대까지 치솟아 ‘부채 위기의 전조’가 닥친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7일 영국은 막대한 부채를 보유한 세계 주요국에 일종의 ‘탄광 속 카나리아’가 됐다고 진단했다. 또 “많은 선진국의 차입 비용이 급증하면서 위기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탄광 속 카나리아’는 과거 광부들이 갱도의 위험을 감지하기 위해 카나리아를 먼저 들여보낸 것에서 유래했다. 다가올 위험을 가장 먼저 알리는 존재를 뜻하는데 영국이 세계 주요국의 부채 위기를 미리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 또한 차입 비용이 증가하는 가운데 늘어나는 복지 지출을 줄여야 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2016년 국민투표로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를 결정한 후 값싼 동유럽 상품과 적은 인건비로도 채용할 수 있는 인력이 들어올 길이 막혔다. 이로 인한 영국의 물가 상승은 국민들의 삶을 더욱 팍팍하게 만들고, 국가경제를 어렵게 만드는 핵심 원인으로 꼽힌다.

BIS에 따르면 영국의 올 1분기 GDP 대비 국가 부채 비율은 86.6%다. 그러나 영국 예산책임청(OBR)은 최근 고령화, 의료 및 연금 지출 증가로 2070년대 초에는 이 비율이 270%로 치솟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스타머 총리와 집권 노동당은 올 3월 장애인 지원금 등을 줄여 연 48억 파운드(약 9조 원)를 절감하는 방안을 마련했지만 당내 반발 등으로 사실상 철회했다. 영국 싱크탱크 재정연구소(IFS)에 따르면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만 건강 악화를 이유로 일하지 않는 사람이 290만 명에 달한다. 코로나19 이전보다 90만 명이나 늘었다.

● ‘유럽의 병자’ ‘녹슨 전차’ 된 獨


유럽 최대 경제대국 독일은 마이너스(―) 성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23년 ―0.9%, 지난해 ―0.5%로 2년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올 1분기에 0.3% 성장으로 반짝 반등했지만 2분기(4∼6월) 다시 ―0.3%로 추락했다. 독일 경제를 ‘유럽의 병자’와 ‘녹슨 전차’ 등에 빗대는 이유다.

우선 주력 산업인 자동차가 미국, 중국 등과의 경쟁에서 뒤처진 데다 전기차 시대로의 전환에서도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독일의 주요 수출시장이었던 중국 또한 최근 경기 둔화로 경제의 탈출구가 되어주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산 에너지에 대한 의존 비율이 다른 유럽 주요국보다 높아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 여파에 따른 악영향도 심각했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뒤 가해진 관세 압박 또한 수출 비중이 높은 독일 경제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이 여파로 2024년에만 최소 20만 개의 독일 회사가 폐업을 신고했다. 특히 독일 노동청은 올 8월 실업자가 302만5000명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실업자가 300만 명을 넘은 건 2015년 2월 이후 10년 6개월 만이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대규모 부양책을 통해 위기를 탈출하겠다는 계획이다. 하지만 이 또한 쉽지 않다는 평가가 많다. 독일은 전통적으로 재정 건전성에 민감한 국가였다. ‘부채 브레이크(Schuldenbremse)’라는 엄격한 나랏빚 운용 기준도 가지고 있다. 이 제도는 정부의 연간 신규 부채를 GDP의 0.35%로 제한한다.

이런 제도 속에서, 지난해 11월에는 재정 확대를 둘러싼 주요 정당의 갈등 때문에 연립정부가 붕괴했다. 메르츠 총리의 전임자인 집권 사회민주당 소속의 올라프 숄츠 전 총리는 당시 우파 자유민주당, 좌파 녹색당과 연정을 구성하고 있었다. 사민당은 침체에 빠진 경제를 살리기 위해 부양책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지만 자민당이 강하게 반대했다. 결국 갈등이 깊어지며 숄츠 전 총리가 사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지난해 독일의 재정적자는 GDP의 2.8% 수준이다. 최근 메르츠 정권이 국방비를 공격적으로 지출하고 있어 이 수치는 늘어날 것이 확실시된다. 메르츠 정권은 올 6월 현재 GDP의 2.4%인 국방비 지출을 2029년까지 GDP의 3.5%로 늘리겠다고 밝혔다. 또 2035년까지 트럼프 대통령이 요구하는 GDP의 5.0%로도 확대할 전망이다. 이 계획이 실현된다면 올 1분기 GDP의 57.8%인 국가 부채가 2029년 70%대로 뛰어오를 가능성이 높다. 독일 경제의 주요 경쟁력으로 꼽혔던 건실한 재정은 이제 과거의 유산이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 포퓰리즘 정당까지 득세

최근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현재 유럽 주요국이 ‘재정적자와 포퓰리즘의 파멸적 악순환(deficit-populism doom loop)’에 빠져 있다고 진단했다. 재정적자 증가가 긴축 재정에 부정적이거나,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포퓰리즘 정당의 득세를 부르고 이로 인해 재정 상태가 더 나빠지는 악순환이 나타난다는 의미다.

재정적자 확대는 주요국 국채에 대한 매력도를 떨어뜨려 국채 가격 하락(국채 금리 상승)을 야기한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각국 정부가 긴축 재정에 나서려 해도 복지 혜택에 길들여진 국민들의 반발이 거세다. 이 틈을 노려 포퓰리즘 정책을 앞세운 정당이 득세하면서 정치 사회적 혼란이 심각해지고 재정 위기 해결 또한 어려워지는 것이다.

실제 최근 영국에서는 브렉시트 국민투표 당시 이를 강하게 지지했던 극우 정치인 나이절 패라지가 이끄는 ‘영국개혁당’이 선전하고 있다. 15일 여론조사회사 유고브 조사에서 영국개혁당 지지율은 29%로 노동당(20%)을 앞섰다. 특히 이민 정책에 민감한 노동계층과 저소득층 유권자를 적극 공략하며 노동당의 입지를 위협하고 있다.

13일 영국 런던에서는 각국 극우 세력이 대규모 반이민 집회도 개최했다. 영국의 극우 운동가 토미 로빈슨, 프랑스 극우 정치인 에리크 제무르, 독일의 극우 정당 독일대안당(AfD)의 페트르 비스트론 연방의회 의원 등은 한목소리로 “이민자가 유럽을 위협하고 있다”고 외쳤다.

이를 감안할 때 앞으로도 상당 기간 유럽의 재정 위기는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허준영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유럽 주요국은 모두 재정 위기와 정치적 불안정성이라는 두 가지 난제에 공통적으로 직면해 있다”며 “유럽 전반에서 극우 정당의 인기가 늘면서 앞으로도 포퓰리즘적 정책이 늘어날 수밖에 없고 이는 재정 위기 해결을 어렵게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혜원 국립외교원 외교안보연구소 북미유럽연구부장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라는 위기를 맞아 유럽 각국이 국방비를 늘려야 하지만 고질적인 재정적자 문제가 발목을 잡고 있다”고 말했다. 또 “기존 지출을 줄이고 국방비를 늘리기 위한 각국 재무장관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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