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명문사립대 명예특임교수의 이 하소연에 오늘날 과학기술계가 마주한 위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대학은 이공계 석학으로 알려진 그가 정년을 마치고도 연구를 할 수 있도록 ‘명예교수’라는 직함을 만들어줬다. 하지만 실질적인 연구 지원을 받지 못하는 허울뿐인 자리였다. 그는 한국에 남은 선택을 후회한다고 했다.
과학기술 패권 경쟁이 치열한 지금 해외에선 유능한 젊은 과학자와 은퇴가 얼마 남지 않은 석학들에게 수십억 원에 달하는 연구비와 고액 연봉, 주택수당 등을 보장하겠다며 손짓하고 있다. 이에 적지 않은 국내 과학자들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
최근 동아일보와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이 진행한 공동 설문조사에 따르면 국내 이공계 석학 200명 중 61.5%가 최근 5년 이내 해외 영입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이 가운데 42%는 실제로 제안을 수락했거나 검토 중이라고 답했다. 국내 과학기술계를 지탱해 온 굵은 뿌리들이 하나둘씩 뽑혀 해외로 떠나고 있는 셈이다. 제안을 받지 않은 학자들조차 80% 이상이 향후 제안이 오면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했다.
해외 영입 기관들은 연구자 맞춤형 조건을 제시하면서 한국 석학들의 마음을 흔들고 있다. 젊고 유능한 과학자에겐 파격적인 연봉과 연구비를 제안하고, 정년을 앞둔 석학에겐 장기적인 연구 환경을 보장하는 식이다.
반면 한국은 오락가락하는 정부의 연구개발(R&D) 예산과 정년 후 활용 제도 부재, 불필요한 행정 절차로 연구자의 등을 떠밀고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출렁이는 R&D 정책은 연구자들에게 불안을 안기고, 연구비 계약조차 믿을 수 없다는 절망감은 해외 이탈의 도화선이 되고 있다. “논문 하나보다 연구비를 따내기 위한 제안서, 성과보고서에 더 신경 써야 하는 이 나라에서 어떻게 연구에 몰입할 수 있겠냐”며 한국을 등진 젊은 과학자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해외로 떠나는 이들은 단순한 ‘개인’ 연구자가 아니다. 특히 석학들은 수십 년간 쌓아온 연구 역량과 노하우, 학계 네트워크를 통째로 갖고 떠난다. 이들의 성과는 영입 국가와 기관의 이름으로 논문에 실리고, 특허와 지식재산권도 타국에 넘어갈 공산이 크다. 결국 과학기술 패권 시대에 국가 경쟁력이 잠식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국내 석학들을 ‘작은 연구소’이자 국가의 자산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새 정부가 들어선 지금이 바로 과학기술계의 ‘골든타임’이다. 인재를 지키지 못하면 더 이상의 미래는 없다. 한국의 과학기술 정책은 이제 단기적 예산 배분이나 화려한 구호에서 벗어나야 한다. 젊은 연구자든 정년을 앞둔 석학이든 ‘여기서 연구를 계속하고 싶다’는 확신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국가 경쟁력이며, 인재 유출을 막는 가장 현실적이고 근본적인 해법이다.
마침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과학기술 예산을 삭감하면서 미국 내 과학자들이 대거 이탈하고 있는 지금이 한국에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 국내 인재와 작별하지 않으면서 역량을 갖춘 재미 과학자들과 해외 인재에게 손을 내밀어 과학기술 패권 국가로 도약할 든든한 패를 확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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