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의원들은 12·3 비상계엄으로 조기 대선이 예견되던 지난해 12월부터 “그래도 상대방이 이재명이라서 해볼 만한 싸움”이라고 했다. 보수 진영이 궤멸될 정도의 큰 악재가 터진 건 8년 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국면과 비슷하지만 그래도 상대방이 보수층과 중도층에서 비호감도가 높은 이재명 대통령이기에 당이 전열만 잘 가다듬으면 대선에서 이기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이런 주장이 현실화하려면 국민의힘은 이 대통령을 뛰어넘는 국민적 비호감도를 낮추는 게 전제돼야 했다. 그런데 국민의힘은 번번이 중도층, 합리적 보수층의 비호감도를 더 높이는 길만 택했다.
보수 진영이 가장 걱정했던 대선 구도는 ‘윤석열 대 이재명’이었다. 이를 막으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비상계엄과 탄핵의 강을 건너는 일이었다. 하지만 국민의힘이 선택한 건 ‘탄핵 당론 반대’였다. 의원들은 너나없이 한남동 대통령 관저 앞으로 달려갔다. 자유한국당 시절 이후 당내에선 사라졌던 ‘아스팔트 보수’를 자처했다. ‘계엄령이 아닌 계몽령’이라는 허언에 맞장구치는 의원들이 적지 않았다. 국민의힘은 그렇게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된 4월 4일까지 4개월을 송두리째 허비했다.
헌법재판소에서 ‘8 대 0’ 파면 결정이 나오자 국민의힘은 뒤늦게 대선 준비에 뛰어들었다. 당내에선 아직도 희망이 있다고 했다. 안철수 오세훈 유승민 한동훈 홍준표 등 전국구 인지도를 가진 대선 후보군을 꽃다발처럼 묶어 ‘감동적인’ 경선을 치르면 이 대통령을 이길 수 있다고 했다. 후보 상당수가 중도층 외연 확장에 강점을 보이는 점도 자신감의 근거였다.
하지만 국민의힘 지도부는 본선 경쟁력 있는 후보를 선택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지 않았다. 그 대신 당원 투표에 더해 국민의힘 지지층과 무당층만을 대상으로 하는 역선택 방지 조항이 담긴 경선 룰을 고집했다. 이 대통령을 이길 후보를 뽑는 게 목적이 아니라 당 주류의 입맛에 맞는 후보를 간택하려는 것처럼 비쳤다. 유승민 전 의원은 경선 참여도 전에 이탈했다.
경선 시작 직전 당 주류들은 느닷없이 ‘한덕수 차출론’을 꺼내 들었다. 대선 이후 있을 당 주도권을 둔 권력 투쟁의 포석이라는 뒷말이 무성했다. 심지어 경선 참여 촉구가 아니고 경선 뒤 단일화를 하자는 주장이었다. 명분 없는 주장에 오세훈 서울시장도 경선 불출마를 택했다.
당 지도부는 급기야 경선에서 선출된 김문수 대선 후보를 강제 교체하려는 시도까지 감행했다. 전대미문의 정치 공작으로 결국 중도층뿐만 아니라 합리적 보수층마저 등 돌리게 만들었다.
한 국민의힘 관계자는 “국민의힘은 매번 정도로 안 가고 꼼수만 썼다”고 했다. 꼼수에 꼼수를 거듭한 국민의힘이 선거 막바지 개혁신당 이준석 후보에게 단일화를 압박한들 이 후보가 받을 명분이 없었다.
6개월간 헛발질만 반복한 국민의힘에 남은 건 민주화 이후 두 번째로 큰 격차의 대선 패배다. 그런데도 이 대통령이 취임 선서를 할 때까지도 책임지겠다는 사람 하나 없다. 이제는 정도를 걸어야 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낄 법한데도 지난 6개월간의 모습 그대로다. 혹시 또 속으로 다른 계산을 하고 있다면 이번엔 당의 존립마저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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