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의 여인이 우물에서 나오고 있다. 손에는 채찍을 들었다. 여자는 화가 난 건지 입을 벌려 소리를 지르는 것 같다. 누구한테 화가 난 걸까. 무엇 때문에 우물에서 나오는 걸까. 대체 저 여인은 누구란 말인가.
이 인상적인 그림은 프랑스 화가 장레옹 제롬이 그린 ‘우물에서 나오는 진실’(1896년·사진)이다. ‘진실은 우물 속 깊은 곳에 숨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의 격언을 시각화한 작품이다. 제롬은 19세기 프랑스 신고전주의 회화의 대가로, 신화나 역사 속 장면을 매혹적으로 그려내 큰 명성을 얻었다. 이 그림은 고전주의 형식을 띠지만 내용은 시대를 향한 날 선 비판을 담고 있다. 19세기 말 프랑스 사회를 휘감았던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논평으로, 화가는 진실이 왜곡되고 은폐된 채 우물 깊숙이 감춰져 있다고 느꼈다. 국가 권력에 의해 간첩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드레퓌스 대위 사건에 화가 났을 테고 진실을 그림을 통해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림 속 ‘진실’이 화가 난 표정인 것도 이 때문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진실은 왜 알몸으로 묘사됐을까. 아무것도 숨기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편하고 외면받기 쉽다. 반면 거짓은 번지르르한 옷과 말로 유혹한다. 우리가 거짓에 속기 쉬운 이유다. 제롬은 진실에게 채찍을 들게 했다. 진실이 사실을 드러내는 데만 그치는 게 아니라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는 무기이자 힘을 갖길 바랐을 테니까.
19세기 프랑스 그림이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 시대의 진실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여전히 우물 속에 갇혀 있는가, 아니면 이제 막 세상 밖으로 나오는 중인가. 감춰진 진실이 세상 밖으로 나오고 진실이 거짓을 완전히 제압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정의로운 세상에 산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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