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철이 성큼 다가왔다! 휴가를 이용해 유럽에 간다면서 스페인 여행을 꼽는 이가 많다. 실제 수치도 놀랍다. 스페인관광청에 따르면 2023년 기준 43만4372명의 한국인이 스페인을 관광차 방문해 총 12억7300만 유로(약 2조623억 원)를 지출했다. 한국 관광객은 평균 8일을 스페인에 머물렀고, 1인당 약 474만 원을 썼다. 휴식과 함께 견문까지 넓히고 돌아온다면 멋진 투자라고 할 수 있다.
스페인 ‘엘 에스코리알’. 사진 출처 스페인 국가유산 관리청유럽 미술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미술사학자로서 스페인으로 ‘그랜드 투어’를 떠난다면 한 곳을 꼭 추천하고 싶다. 바로 ‘엘 에스코리알(El Escorial)’이다. 스페인의 대표 관광지 하면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나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 그라나다의 알람브라 궁전을 떠올린다. 하지만 엘 에스코리알은 이곳에 뒤지지 않을 만큼 볼거리도 많고 역사적인 곳이다. 한마디로 스페인이 대제국을 이뤘을 때의 위용을 가장 잘 간직한 곳으로, 스페인 역사의 흥망성쇠를 느끼는 데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
● 압도적 규모의 왕궁 겸 수도원
엘 에스코리알은 수도 마드리드에서 북서쪽으로 45km 위치에 있다. 정식 명칭이 ‘왕립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이라 수도원으로 생각하지만, 왕궁 역할이 더 컸다. 스페인 왕실을 위한 다목적 건축물로 지어져 성당과 도서관, 왕실 영묘, 신학교, 병원, 식물원 기능까지 갖췄다.
엘 에스코리알 앞에 서면 일단 규모에 압도된다. 폭 207m, 길이 161m의 사각형 형태의 장중한 석조 건축물이다. 방의 개수도 4000개에 이른다. 프랑스에 베르사유 궁전이 있다면, 스페인에는 엘 에스코리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건립 시기는 베르사유보다 100년 앞서 1563∼1584년에 지어졌다.
티치아노가 그린 ‘펠리페 2세’(1551년경). 사진 출처 프라도 미술관이 엄청난 건축물을 지은 장본인은 펠리페 2세이다. 그는 1556년 왕위에 올라 1598년 세상을 뜰 때까지 42년간 스페인을 통치했다. 스페인의 최전성기라고 하는 16세기 후반 스페인은 펠리페 2세의 시대였고, 그가 남긴 최고의 예술적 업적이 바로 엘 에스코리알이다.
스페인 ‘엘 에스코리알’과 그 평면도. 평면 구성이 성 로렌스 순교의 상징인 석쇠를 닮았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위키미디어펠리페 2세는 즉위한 이듬해인 1557년 숙적 프랑스에 큰 승리를 거뒀는데, 마침 승전일이 성 로렌스의 축일과 같아서 엘 에스코리알을 성 로렌스에게 봉헌한다. 전체적인 평면 구성이 성 로렌스가 순교할 때 화형당한 철판 석쇠와 비슷해 보인다.
먼저 중앙에는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성당의 머리 부분이 석쇠의 손잡이처럼 위로 튀어나와 있는데 성당 왼편에는 왕궁, 오른편에는 수도원이 배치돼 있다. 참고로 펠리페 2세는 집무실과 침실을 성당 제단과 수도원 사이에 마련했다. 집무실은 대제국을 지배한 군주의 공간으로 보기엔 작고 소박하다. 하지만 바로 옆에 붙은 그의 침실을 보면 그가 무엇을 원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성당의 제단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침실을 정해 누워서도 24시간 미사를 볼 수 있도록 했다.
● 가톨릭 제국 꿈꾸다 : 몰락의 시작
이처럼 신앙이 앞선 공간 배치에서 보듯이 펠리페 2세는 신앙심이 깊었다. 이에 그는 엘 에스코리알처럼 왕궁이 수도원과 결합한 독특한 건축물을 원했고, 한발 더 나아가 자신의 대제국을 가톨릭 신앙으로 묶어 완벽한 가톨릭 군주가 되고자 했다. 이 때문에 이교도를 추방하며 종교전쟁을 마다하지 않았는데, 이 같은 결정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스페인 대제국은 국력을 낭비하며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말할 때 빅토리아 여왕 시절의 영국을 떠올리지만, 원조는 펠리페 2세의 스페인이라고 할 수 있다. 펠리페 2세는 아버지 카를로스 1세로부터 막대한 영토를 물려받아 유럽에서는 스페인뿐 아니라 네덜란드와 이탈리아 나폴리, 밀라노 지역까지 통치했다. 또 바다 건너 아메리카 대륙의 상당 부분을 지배했고, 여기에 필리핀을 포함해 아시아 곳곳에도 교두보를 마련했다. 특히 펠리페 2세는 포르투갈과 합병해 포르투갈이 통치하던 식민지까지 흡수하면서 스페인 제국을 문자 그대로 전 세계적으로 확장시켰다.
포르투갈과의 합병을 계기로 스페인 왕실의 부는 넘쳐나게 된다. 연간 600만 두카트였던 수입이 이후 1000만 두카트까지 늘었다. 여기에 신대륙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금은보화 덕분에 왕실의 수입은 안정을 넘어 풍요 그 자체였다. 참고로 펠리페 2세가 통치 기간 아메리카로부터 받은 총수입이 6450만 두카트였다고 한다. 당시 스페인 왕실은 아메리카에서 넘어오는 재화의 5분의 1을 세금으로 받았으니, 신대륙에서 스페인으로 유입된 부의 총량은 천문학적이었다.
그러나 막대한 수입도 그것을 초과하는 지출 앞에서는 무의미한 숫자에 불과했다. 펠리페 2세가 가톨릭의 권위를 위해 종교전쟁을 벌이면서 군사비 지출이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특히 신교도를 탄압해 네덜란드 독립전쟁을 자초하는데, 1568년 시작한 네덜란드와의 전쟁은 1648년까지 80년간 이어지며 스페인 제국을 병들게 한다. 스페인의 군사비는 네덜란드와의 전쟁 전에는 연간 200만 두카트였지만, 전쟁 직후 400만 두카트로 증가했다. 펠리페 2세가 사망하던 1598년에는 스페인 왕실의 연수입에 해당하는 1000만 두카트까지 늘게 된다. 여기에 네덜란드를 돕는 영국을 제압하기 위해 해군까지 육성하며 1000만 두카트를 쏟아붓지만 1588년 영국과의 해전에서 크게 패하면서 제해권을 완전히 잃고 만다.
가톨릭 순혈국가를 꿈꾸며 이교도를 추방한 것도 제국이 무너지는 원인이 됐다. 스페인은 급증하는 전쟁비용을 국채를 발행해 메웠는데, 국내에서 은행업을 하던 유대인들을 추방하면서 이탈리아와 독일 같은 외국 은행업자들에게 돈을 빌리게 됐다. 국채 이율은 32%까지 치솟아 국가의 수입 대부분을 이자를 갚는 데 써야 했고, 여기에 비효율적인 관료 시스템까지 겹쳐 국가가 연속적으로 파산을 선언하고 만다. 스페인은 펠리페 2세 재위 동안 1557년, 1560년, 1575년, 1596년 모두 네 차례나 국가 파산을 선언하는 수모를 겪는다.
● 미술을 사랑한 ‘문화 군주’
비록 펠리페 2세의 정치력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미술에 대한 그의 업적에 대한 평가는 확고한 듯하다. 이는 기념비적인 엘 에스코리알 덕분이다. 건축가를 선정하고, 건물 내부에 들어갈 그림을 고르는 세세한 일까지 모두 펠레페 2세가 직접 챙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엘 에스코리알은 일종의 왕실미술관 같은 역할도 했다. 소장하던 미술품 중 상당수를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이관했어도, 여전히 1150여 점의 미술품이 엘 에스코리알 곳곳에 전시돼 있다. 특히 펠리페 2세는 당시 최고의 화가로 인정받던 티치아노를 좋아해 그의 작품을 열성적으로 수집했다. 덕분에 티치아노의 후기 명작을 한없이 감상할 수 있는 곳이 엘 에스코리알이다.
스페인관광청에 따르면 2024년 스페인의 관광 수익은 2000억 유로를 돌파했다. 이는 스페인 국내총생산(GDP)의 13.4% 수준이다. 스페인이 이와 같은 관광대국이 된 데에는 펠리페 2세의 공헌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미적 취향이 한껏 발휘된 엘 에스코리알에 투여된 재정은 그가 재위 기간에 쓴 전쟁비용에 비하면 극히 미미한 수준일 것이다. 하지만 펠리페 2세가 성군으로 평가받으며 예술적 비전을 갖춘 문화 군주로 인정받을 때마다 엘 에스코리알이 언급되는 것을 보면, 그가 엘 에스코리알에 투여한 재정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는 투자였던 셈이다.
흔히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말하곤 한다. 뒤집어 보면 짧은 인생을 길게 만드는 게 바로 예술일 수 있다. 엘 에스코리알은 스페인 제국의 명암을 긴 역사적 호흡으로 되새겨 볼 수 있는 그런 예술적 성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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