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맹렬했던 더위도 입추와 말복을 지나니 한결 누그러진다. 곧 휴가철도 마무리되면서 모든 것이 일상으로 차차 되돌아갈 것이다. 휴가 후유증이 염려될 때인데 가장 큰 걱정거리는 아마도 카드값이 아닐까. 휴식을 위해 지불한 비용이 차곡차곡 쌓여 냉정한 내역서로 몰려올 터이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여행을 위해 쓴 비용이 스마트한 투자였다면 조금은 위안이 될까. 바로 이 점을 꼭 집어 주장하는 흥미로운 경제학 논문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독일 도르트문트 공대의 헬만지크 경제학 교수가 2012년 발표한 흥미로운 연구 결과다.
● 여행이 예술에 미치는 영향
그는 화가에게 여행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1850년부터 1945년 사이에 태어난 214명의 슈퍼 스타급 화가를 대상으로 조사를 벌였다. 이들이 남긴 작품의 가격 변화를 지난 20년간의 경매 기록을 기준으로 검토한 것. 그는 논문에서 “동일한 화가라도 여행을 떠난 해나 여행 직후에 제작된 작품은 여행을 하지 않은 시기에 제작된 작품보다 평균적으로 7%가량 더 높은 금전적 가치를 지닌다”고 주장했다. 그는 여행한 장소와 시기도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특히 프랑스로의 여행은 전반적으로 6.8%의 경매가 상승 효과를 보였다.
그는 특히 1870∼1913년이라는 시간대를 주목했다. 소위 ‘벨 에포크 시대’라고 불린 시기다. 문화와 예술이 문자 그대로 ‘아름다운 시대’였다. 이 시기 프랑스 파리는 유럽의 문화적 수도로서의 역할을 했다. 비록 제1차 세계대전으로 벨 에포크 시대는 파국을 맞았지만, 이 시기 화가들이 여행차 프랑스를 찾아 그린 그림의 경매 가격은 여행을 하지 않았던 시기의 그림에 비해 무려 41.1% 비싸다고 한다. 이 놀라운 수치는 소위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파리를 중심으로 화려하게 꽃피웠던 프랑스의 문화적 위상을 경제적으로 증명해 줬다고 볼 수 있다.
벨 에포크 시기 파리에서 예술혼을 불태운 작가 가운데 ‘여행광’으로 불린 화가들이 있다. 바로 앙리 마티스, 파블로 피카소, 마르크 샤갈이다. 이 논문에 따르면 전체 생애에 걸쳐 마티스는 23번, 피카소는 27번, 샤갈은 28번씩 여행을 했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파리 토박이는 아니었지만, 파리에 가서 비로소 화가로 급성장했다. 그리고 세 화가는 파리에 정착한 후 남부 프랑스 해변으로 자주 여행을 떠난 공통점이 있다.
● 화가들이 사랑한 바다 ‘지중해’
코트다쥐르 또는 프랑스 리비에라로 불리는 프랑스 남부 해안은 지중해 바다의 매력을 한껏 품은 곳으로, 연중 300일이나 맑은 날씨를 가진 사계절 휴양지다. 마티스, 피카소, 샤갈이라는 현대미술의 슈퍼스타는 이곳을 여행지로 좋아하다가 아예 최종 안식처로 삼아 버렸다. 누구보다도 정서적으로 예민했던 세 명의 현대미술 대가는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넘실대는 푸른 바다를 통해 문명에 지친 삶이 치유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이곳에서 이들은 지친 심신을 회복했고, 예술혼을 불태웠다. 휴가와 여행이 주는 마법 같은 매력을 확실히 보여준 셈이다.
그렇다면 마티스, 피카소, 샤갈이 대자연을 통해 얻은 예술적 성취를 감상해 보는 건 어떨까. 태양의 기운을 한껏 담은 이들의 지중해 그림은 우리가 휴가지에서 얻은 경험을 일깨움과 동시에 한발 더 나아가 여행이 단순한 추억이 아닌 미래를 위한 멋진 투자로 되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해 줄지 모른다.
독일 도르트문트 공대 헬만지크 경제학 교수의 연구 논문에 따르면 화가에게 여행은 작품의 금전적 가치를 상승시키는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은 현대미술의 대표 화가로 꼽히는 앙리 마티스가 지중해 풍경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작품. 마티스의 ‘사치, 고요, 그리고 관능’. 사진 출처 퐁피두센터먼저 마티스(1869∼1954)의 지중해 그림을 살펴보자. 마티스는 프랑스 북부의 공업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북유럽 특유의 흐린 하늘과 삭막한 공업 도시 환경에 익숙했다. 그랬던 그가 1904년 처음 지중해의 강렬한 햇빛을 만나게 되는데, 이때 받은 엄청난 시각적 충격은 그의 작품 세계를 완전히 바꿔 놓는다. 마티스의 첫 번째 예술적 성취로 알려진 ‘사치, 고요, 그리고 관능’(1905년)은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화면은 원색의 점으로 가득하다. 붓터치를 빛의 입자처럼 점으로 찍어 그리는 그림 기법은 그를 지중해 바다로 초대한 폴 시냐크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화려한 원색과 함께 형태를 과감하게 변형시키는 방식은 그가 창안해 낸 야수파 그림을 강하게 연상시킨다. 그는 따뜻한 대자연을 통해 얻는 행복감을 해변가에서 휴식하며 물놀이하는 인물들을 통해 표현하는데, 이들을 배경으로 여유롭게 펼쳐진 원색의 바다 풍경은 그가 이때 머물렀던 지중해 바다 그 자체다.
피카소(1881∼1973)의 생애와 작품 세계를 가로지르는 핵심 키워드는 바로 ‘지중해’다. 피카소는 스페인 지중해가 있는 말라가에서 태어났고, 이후에도 끊임없이 지중해 바닷가를 찾다가 1946년부터는 아예 지중해 도시에 정착해 생을 마감했다. 스스로를 ‘지중해의 아들’이라고 자부했던 그의 작품을 살펴보면 주제, 색채, 기법 등에 지중해의 기운이 강하게 스며든 것을 알 수 있다.
● 작품 속 지중해 풍경이 전하는 평화와 행복
독일 도르트문트 공대 헬만지크 경제학 교수의 연구 논문에 따르면 화가에게 여행은 작품의 금전적 가치를 상승시키는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은 현대미술의 대표 화가로 꼽히는 파블로 피카소가 지중해 풍경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작품. 피카소의 ‘삶의 기쁨’. 사진 출처 앙티브 피카소박물관피카소가 1946년에 그린 ‘삶의 기쁨’은 그가 지중해 도시에 정착한 직후에 그린 그림이다. 같은 제목의 마티스 그림을 참고해 그리면서도 동물들을 적극적으로 등장시켜 훨씬 동화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들이 함께 어울려 추는 춤은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찾아온 해방감의 표현일 수도 있고, 푸른 남쪽 바다로 내려와 살게 되면서 느낀 생명의 예찬일 수도 있다.
동유럽 내륙에 위치한 벨라루스 출신인 샤갈(1887∼1985) 역시 지중해를 방문한 뒤 시각적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파리에 거주하며 창작 활동을 이어가던 그는 1925년 여름 프랑스 남부 해안을 처음 방문한 것을 계기로 지중해의 매력에 빠져든다. 이후 수시로 지중해를 찾다가, 1950년 방스에 정착한다. 그리고 얼마 후 생폴드방스로 거처를 옮긴 뒤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독일 도르트문트 공대 헬만지크 경제학 교수의 연구 논문에 따르면 화가에게 여행은 작품의 금전적 가치를 상승시키는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은 현대미술의 대표 화가로 꼽히는 마르크 샤갈이 지중해 풍경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작품. 샤갈의 ‘식탁과 마을 풍경’. 사진 출처 개인 소장샤갈이 1968년에 그린 ‘식탁과 마을 풍경’의 배경엔 그가 살던 생폴드방스의 풍경이 평화롭게 펼쳐져 있다. 바둑무늬 식탁보 위에 놓인 음식은 소탈하지만, 와인병과 꽃이 가득한 화병은 여유로움을 더해 준다. 새를 타고 하늘을 나는 연인은 행복감을 상징하며, 그림을 뒤덮은 파란색 톤은 지중해만이 줄 수 있는 색채감이다.
※참고 자료: Christiane Hellmanzik, ‘Does travel inspire? Evidence from the superstars of modern art’, Empirical Economics, vol. 45(2012): 28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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