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앞문이 닫히면 뒷문을 열어라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7월 21일 23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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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강 하류 북한 나선시와 러시아 하산을 잇는 850m 길이 ‘조로(북-러) 국경 자동차다리’ 착공식이 올해 4월 30일 하산과 나선시에서 동시에 열렸다. 노동신문 뉴스1
두만강 하류 북한 나선시와 러시아 하산을 잇는 850m 길이 ‘조로(북-러) 국경 자동차다리’ 착공식이 올해 4월 30일 하산과 나선시에서 동시에 열렸다. 노동신문 뉴스1
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주성하 콘텐츠기획본부 기자
단절된 남북 관계 복원은 현 정부에 매우 중요한 과제다. 그래서 국가정보원부터 통일부 출신들로 채웠다. 국정원장엔 통일부 장관 출신이, 원장 특보엔 통일부 차관 출신이 임명됐다. 통일부 장관 역시 통일부 장관을 한 차례 지낸 중량감 있는 인사가 발탁됐다. 통일부와 국정원 쌍끌이로 김정은을 대화로 끌어내라는 뜻이다.

하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김정일 시대 남북 정상회담에 관여한 ‘선수’들이 동원된다 하더라도 물밑 비선 접촉 경험이 또 통할지 미지수다. 그땐 그래도 ‘동족’ 관계였을 때다. 김정은은 남북 관계를 ‘동족 관계’가 아닌 ‘적대적 두 국가 관계’로 규정했다. 만천하에 “대한민국 족속들은 우리의 주적”이라고 선언하고 다시는 말을 섞지 않겠다며 돌아앉았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얼굴’의 일본말, ‘체면’이라는 뜻)가 없냐”고 소리치는 사람의 ‘가오’는 꺾기 쉽지 않다. 하물며 상대는 가오에 살고 가오에 죽는 김정은이다. 과거처럼 개성공단이나 금강산 관광 같은 경제 협력 제안으론 꼼짝도 하지 않을 것이란 뜻이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다. 물밑 접촉이 먹히지 않으면 시간에 쫓겨 초조한 것은 우리뿐이다. 방법은 없는 걸까. 정 없지는 않다고 본다. 단시일에 어려우면 길게 보고, 정면 돌파가 어려우면 우회하면 된다. 남북 관계에서 우회 돌파할 틈이 마침 보인다.

올해 5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모스크바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때 발표된 공동성명에 의미심장한 구절이 있다.

“동북아 지역 교통, 에너지, 무역, 투자, 디지털 경제, 농업, 관광 분야에 관한 두만강 이니셔티브 참여국 간 협력 발전에도 노력하겠다”는 대목이다. 같은 내용은 지난해 중국 베이징에서 발표된 중-러 정상 공동성명에도 들어 있다.

두만강 이니셔티브 또는 광역 두만강 개발 계획(GTI)으로 불리는 프로젝트는 한국인들 머릿속에서는 잊힌 지 오래다. 이 계획은 중국 러시아 한국 북한 몽골이 참여해 두만강 유역을 개발한다는 프로젝트다. 1990년대 초반 유엔개발기구(UNDP) 주도로 추진됐다. 중국 옌지(延吉),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북한 청진을 잇는 대삼각지구에 국제자유무역지대를 설립하는 동북아 지역 협력 프로젝트였다. 김일성은 죽기 전 이 프로젝트에 북한 발전의 명운이 걸렸다고 흥분했다. 하지만 북한은 2009년 중국과 러시아가 유엔 대북 제재에 동참했다는 이유로 이 프로젝트에서 탈퇴했고 돌아오지 않았다. 삼각 축에서 하나가 빠졌으니 프로젝트는 유명무실해졌다.

하지만 중-러 공동성명에서 보듯 양국은 여전히 이 프로젝트에 관심이 매우 크다. 러시아 재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시베리아의 힘’ 가스관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멈춰 섰다. 푸틴이 러시아의 전략적 우선순위라고 한 ‘극동 개발’은 가스를 팔아야 성공한다. 중국은 낙후된 동북 3성을 키우려면 태평양으로 가는 길을 뚫어야 한다.

상황도 달라졌다. 김정은은 이제 푸틴이 잡아 끌면 활짝 웃으며 그 품에 뛰어든다. 내년 두만강 하류엔 90년 만에 북한과 러시아를 잇는 새 대교가 완공된다. 이에 발맞춰 러시아는 북한까지 연결되는 고속도로를 건설하겠다고 얼마 전 밝혔다. GTI 최대 수혜자가 될 중국 시진핑까지 푸틴과 함께 손을 내밀면 김정은이 거절하기 어렵다. 또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난 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으로 하여금 ‘돈 냄새’를 맡아 끼어들게 만들고 일본까지 끌고 오면 금상첨화다.

돈도 충분하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1000억 달러(약 138조 원)가 쌓여 있는데 한국 지분이 약 4%나 된다. GTI 사무총장은 내년까지 한국인이 맡는다.

한국도 GTI 수혜국이 된다. 1억 명이 사는 동북 3성이 동해와 연결되면 동해안 항구 도시들은 물론이고 일본까지 영향을 받는다. 극동 개발에 러시아가 안심하고 부를 수 있는 나라도 한국뿐이다.

방에 박혀 나오지 않겠다는 사람 불러내는 일을 꼭 내가 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친구도 부르고, 이웃도 불러야 한다. “이쪽이 불러서 어쩔 수 없이 나왔다”고 김정은이 변명할 수 있도록 해 체면을 세워 줘야 한다. 다만 우리는 “문 좀 두드려 달라”고 적극적으로 이웃에게 요청하는 자가 돼야 한다. 앞문이 막혔을 때 뒷문을 열어 보는 것은 상식이다.

#남북 관계#북한#두만강 이니셔티브#광역 두만강 개발 계획#중국#러시아#김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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