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실리콘밸리에서는 한 인공지능(AI) 스타트업을 둘러싼 드라마 같은 인재 쟁탈전이 화제가 되고 있다. AI를 활용해 개발자들의 코딩을 지원하는 윈드서프는 직원은 300명 수준으로 적지만 오픈AI가 역대 최대 규모인 30억 달러를 들여 인수를 추진할 정도로 기술력이 탄탄한 회사다. 지난달 11일 회사가 직원들을 회의실로 소집했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모두 오픈AI의 공식 인수 발표가 있을 것으로 짐작했다. 하지만 결과는 너무나 예상 밖이었다. 믿었던 오픈AI 인수는 무산되고 도리어 회사 최고경영자(CEO)와 공동창업자, 주요 연구진이 직원들만 남기고 통째로 구글에 이직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축제의 장이 됐어야 할 회의장 분위기는 이내 차갑게 식었다. 일부 직원은 충격과 배신감에 눈물도 흘렸다.
핵심인력만 쏙 빼가는 인재 사냥
구글은 이번 전격적인 인재 영입 과정에서 최근 실리콘밸리에서 유행하는 ‘애크하이어’라는 독특한 방식을 활용했다. ‘인수’(acquisition)와 ‘고용’(hire)의 합성어로 회사 자산이나 지분, 제품은 남겨두고 필요한 인재만 쏙 빼 오는 수법이다. 회사 전부를 인수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규제 당국의 반독점 심사나 불필요한 조직 통합 과정을 건너뛸 수 있고, 핵심 인력을 한 번에 데려와 빠르게 원천기술을 확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반면 인재가 빠져나가는 스타트업 입장에선 회사가 사실상 빈껍데기만 남는 신세가 된다. 이번에 구글로 자리를 옮긴 윈드서프 CEO도 “난파선에 직원을 버려놓고 탈출한 선장”이라는 비판을 들었다.
글로벌 테크업계의 인재 전쟁은 말 그대로 군사작전이나 정글의 혈투를 방불케 한다. 인재 영입이 한 번에 대규모로 이뤄지고 천문학적인 돈이 오가는 데다, 상대의 인정사정을 봐주지 않고 기습적으로 진행된다. 오죽하면 인재를 ‘밀렵’(poach)한다는 표현까지 쓰일까. 기업들은 경쟁력 있는 직원을 뽑기 위해 거액의 보너스를 제안하고, 상대 기업은 거꾸로 인재를 뺏기지 않으려고 기존 직원에 대한 보상을 높인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요즘 실리콘밸리 개발자들의 몸값은 상상을 초월하게 불어났다. 최근 인재 유치에 사활을 걸고 있는 메타는 애플 구글 등 경쟁사의 연구원들에게 1억∼2억 달러의 보상 패키지를 제안하고 있다. 기술 인재 보상 없으면 패자 전락할 것
빅테크들이 슈퍼 인재에게 수억 달러의 돈을 아낌없이 쓰는 것은 AI 시대일수록 극소수의 천재가 모두를 먹여 살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실제 실리콘밸리 유망 스타트업의 직원 1인당 매출이나 기업 가치는 기존 대기업의 수십, 수백 배에 달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기술 인재에게 확실한 보상을 한다는 원칙이 뿌리 깊게 정착돼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현기증 나는 기술 발전 속도다. 인재 확보에 실패할 경우 순식간에 경쟁에서 밀려나 도태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기업들은 과감한 투자를 할 수밖에 없다. AI가 일반 대다수 근로자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가운데 일부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는 부조리가 벌어지고 있다.
슈퍼 인재를 길러내지도, 천문학적 몸값을 지불하고 이들을 데려오지도 못하는 한국에 이런 ‘쩐의 전쟁’은 너무나 먼 얘기처럼 느껴진다. 경직된 노동시장과 낡은 호봉제, 결과적 평등주의에 매몰된 우리는 경쟁국과의 인재 전쟁에서 판판이 깨질 수밖에 없다. 그나마 남아 있던 인재도 해외 유출이 심각한 와중에 최근엔 등록금 인상 한도를 더 낮추는 법안까지 국회를 통과했다. 대학들이 저마다 재정난에 허덕이는데 우수한 학생을 어떻게 배출하고 실력 있는 교수를 어디서 데려오나. 기술 인재를 파격적으로 대우하고 혁신을 장려하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지 못하면 ‘100조 AI 펀드’, ‘AI 3대 강국’ 같은 목표는 또다시 헛구호에 그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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