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한애란]전세대출이 만든 거품을 꺼뜨리려면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7월 25일 23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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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애란 경제부 기자
한애란 경제부 기자
전세의 월세화. 요즘 부동산 시장의 큰 화두다. 6·27 대출 규제로 신축 아파트는 사실상 세입자의 전세대출이 거의 막혔다. 전세퇴거대출 한도가 1억 원으로 묶인 것도 세입자에겐 부담이다. 전세 물량은 점점 줄고, 반전세 또는 월세가 늘어간다.

사실 전세의 월세화는 1990년대부터 나왔던 얘기다. 금리가 장기적으로 하락하는 추세에서는 집주인들이 전세보단 월세를 선호할 수밖에 없어서다. 10여 년 전부턴 아예 ‘전세 소멸론’까지 나돌았다. 2016년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전세 시대는 하나의 추억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웬걸, 전세시장은 그 뒤로도 오랫동안 건재했다. 꺼져가는 듯했던 전세의 생명력을 되살린 건 바로 전세대출이었다.

은행에 이자 내고 전세 사는 시대

정부가 ‘서민 주거안정’을 명목으로 전세대출 보증 한도를 1억 원에서 2억 원으로 올린 게 2008년. 이후 2015년엔 전세대출 한도가 최대 5억 원으로 더 늘었다. 목돈 없이 은행에 대출 이자만 내고 전세 사는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이자가 월세보다 더 저렴한 데다, 소득도 따지지 않고 빌려줬으니 세입자로선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집주인도 반겼다. 이자율 낮은 전세대출 덕에 전세 수요가 넘치면서 집주인은 전셋값 올려받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전세대출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지난 7년 동안 주택담보대출은 50% 정도 늘었지만, 전세대출은 100% 넘게 증가했다. 가계부채 증가의 주범이다.

전세의 본질은 사금융이다. 집주인이 세입자로부터 목돈을 빌리면서 월세와 이자를 퉁친 게 전세다. 이런 사금융 성격의 시장에 공적보증 받은 저렴한 전세대출 자금까지 대거 유입됐으니, 불붙은 부동산 시장에 부채질하는 꼴이 됐다. 고삐 풀린 전세대출은 서울 전셋값을 끌어올렸고, 전셋값 상승은 높은 집값을 정당화했다. 전세 끼고 집 사려는 갭투자가 활개를 쳤다.

만약 갭투자를 근절해서 서울 아파트값 상승세를 잡는 게 목적이라면 방법은 하나, 전세대출부터 잡아야 한다. 그리고 이건 이미 오래전, 부동산 광풍이 휩쓸었던 문재인 정부 시절부터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누구도 감히 손대지 못했다. ‘전세 세입자=서민’ ‘전세대출=서민대출’이란 통념이 규제를 주저하게 했다. 금융위원회는 전세대출에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를 적용하는 방안을 몇 년째 만지작거리고만 있다.

지금 정부는 부동산 시장 안정화를 위해 이 전세대출 규제 칼을 드디어 꺼내 들 기세다. 분명 정책의 효과는 있겠지만, 대출 절벽에 처할 세입자 반발은 피할 수 없다. 그래도 지금처럼 지지율 높은 정권 초기라면 돌파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월세시대 맞이할 준비 돼 있는가

진짜 문제는 그 이후다. 우리 사회는 아직 본격적인 월세시대를 맞이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 전세가 월세로 바뀌면 세입자의 임차료 부담이 늘고 가처분소득은 줄어들 게 뻔하다. 갑작스러운 실직·질병으로 월세를 내지 못해 살던 집에서 쫓겨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도 커진다.

그래서 저렴한 공공임대주택 공급이 반드시 뒤따라줘야 한다. 하지만 시간과 돈이 너무 많이 든다. 국가 재정 측면에서 보면 가계부채(전세대출)를 잡는 대신 공공부채(한국토지주택공사 부채)를 대폭 늘리는 방향이다. 이 역시 장기적으론 국가 경제에 또 다른 부담으로 작용한다.

전세보다 월세, 가계부채보다 공공부채. 이런 낯선 방향 전환을 국민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떻게 여론을 설득해 공감을 끌어내느냐에 정책 성패가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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