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보는 방식을 바꾼 ‘아기’라는 窓[2030세상/김지영]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7월 27일 2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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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스타트업 투자심사역(VC)·작가
김지영 스타트업 투자심사역(VC)·작가
어느덧 출산한 지 97일, 복직한 지 9일이 됐다. 100일도 안 된 아기를 놓고 출근하는 길은 아직 조금 슬프다. 매 순간 이게 맞나 죄책감에 시달리지만 후회할 겨를이 없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광대가 아플 정도로 입가에는 웃음이, 어딘지 찡한 마음에 눈가에는 눈물이 고이는 존재…. 나는 감히 상상해 본 적조차 없다.

전생이라 칭할 정도로 너무 많은 것들이 바뀌었지만 그중에서도 인상 깊은 한 가지를 꼽자면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다. 며칠 전, 집 앞 가득 쌓인 아기용품 택배를 정리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옆집 주민이 내리더니 “혹시 아기 낳으셨어요?”라고 물었다. 그렇다고 답하자 “그러셨구나, 축하드려요!”라고 반색을 했다. “아기가 종종 울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난처한 표정으로 말하는 내게 “괜찮아요, 괜찮아요”라며 연신 손을 내저었다. 그날 이후, 5년간 왕래가 없었던 이웃과 안부를 묻고 지내게 됐다.

‘아기에게 친절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가령 아기를 안고 길을 가다 보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마주치는 사람들이 싱긋 미소를 짓는다. 언젠가는 교복 입은 학생 둘이 지나가며 이런 말을 했다. “천사다 천사.” 이렇게 기분 좋은 뒷말이라니. 넉살 좋은 일부는 다가와 말을 걸기도 한다. “아이, 예뻐라. 몇 개월이에요?” 아기만 보면 무장 해제되는 사람들. 마치 세상의 때를 숨겨주듯, 가진 것 중 가장 순박한 얼굴을 기꺼이 내보여준다.

내가 접하는 세상의 표정뿐 아니라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또한 바뀐 것을 체감하고 있다. 엘리베이터, 놀이터, 카페 어디든 아기만 보면 말을 걸고 싶어 입이 근질거린다. “몇 개월이에요?”라는 질문으로 시작되는 세상 제일 다정한 대화. 웃는 얼굴로 ‘내 새끼’를 바라보는 이를 싫어하는 부모는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아기를 낳기 전에는 공공장소에서 우는 아기들이 불편했다. 머리로는 이해하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지금은 저렇게 우는 아기가 얼마나 힘들지 짠한 마음과 애타는 부모를 향한 안쓰러운 마음이 먼저 인다. 역시 사람은 본인 입장이 돼 봐야 아는 존재라는 것을 여실히 깨닫고 있다.

얼마 전 아기를 안고 놀이터 벤치에 앉아 있는데 한 할머니가 다가와 말을 거셨다. “어머나, 예뻐라. 몇 개월이에요?” 뒤에서는 네다섯 살쯤 먹은 손주의 장난이 한창이었다. “OO야, 하지 마!” 할머니는 맞벌이인 자식 부부의 아이를 돌봐주고 있다고 하셨다. “애 하나 키우는 게 보통 일이 아니야. 요즘은 애들이 하도 귀해서.” 품에 안겨 꼬물거리는 아기를 그윽하게 바라보며 덧붙이셨다. “세상에 와줘서 고마워.” 그 말의 향기가 오래도록 진하게 남았다.

‘아기’라는 창을 통해 세상을 다시 배운다. 알밤만 한 손으로 온 힘을 다해 고작 내 검지 하나를 쥔 너무 작은 존재를 보면 문득문득 겁도 나지만, 아기가 자라는 만큼 나도 자랄 것이다. 다시 사는 삶 97일째, 내 품에 안겨 잠든 보드랍고 말캉하고 따듯한 너를 느끼며 깨닫는다. 나는 지금 사랑이라는 감정을 다시 처음 배우고 있다.

#출산#복직#아기#죄책감#소통#이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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