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8월 1일… 여성 의병장 윤희순 숨지다[이문영의 다시 보는 그날]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7월 30일 23시 0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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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윤희순 의사 초상.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독립운동가 윤희순 의사 초상.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이문영 역사작가
이문영 역사작가
윤희순은 조선시대 첫 여성 의병장이다. 선비 집안에서 태어난 윤희순은 1875년 16세의 나이로 화서학파 유제원과 결혼했다. 화서학파는 이항로를 스승으로 모시는 학파로 위정척사 운동에 앞장섰다.

일본은 1895년 낭인들을 동원해 경복궁을 기습한 뒤 명성황후를 시해했다. 친러파로 기운 명성황후를 죽여 정권을 친일파로 바꾸기 위함이었다. 이후 친일파 정권은 근대화 개혁을 한다며 전국에 단발령을 내렸다.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 하여 머리칼을 자르지 않는 풍습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다. 이 성급한 조치는 명성황후 시해로 불타오른 민심에 기름을 끼얹었다. 이때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는데, 이 의병을 ‘을미의병’이라고 부른다. 윤희순의 시아버지와 남편도 의병으로 나섰다. 시백부 유인석은 훗날 대한제국 13도의군 도총재(총사령관)로 추대된 인물이다.

윤희순은 여성들을 모아 ‘안사람 의병단’을 조직했다. 의병 지원 문제가 그 계기가 됐다. 의병 패잔병들이 마을로 몰려와 식량을 막무가내로 요구하자 윤희순은 여성들을 설득해 의병단 지원에 나섰다. 후환이 두려워 반대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윤희순의 거듭된 설득에 점차 지원 여성들이 늘며 조직이 형성됐다.

윤희순은 단결심을 고취하기 위해 노래도 만들었다. ‘안사람 의병노래’는 이러하다. ‘아무리 왜놈들이 강성한들 우리들도 뭉쳐지면 왜놈 잡기 쉬울세라.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 사랑 모를쏘냐. 아무리 남녀가 분별한들 나라 없이 소용있나. 우리도 나가, 의병하러 나가보세. 의병대를 도와주세. (중략) 우리 의병 도와주세. 우리나라 성공하면 우리나라 만세로다. 우리 안사람 만세, 만만세로다.’

윤희순은 ‘왜놈 대장 보거라’라는 제목의 격문도 썼다. ‘너희 놈들이 우리 임금님, 우리 안사람네들을 괴롭히면 우리 조선의 안사람들도 가만히 보고만 있을 줄 아느냐. 우리 안사람도 의병을 할 것이다. 조선 선비의 아내 윤희순.’

1907년 일제의 고종 강제 퇴위, 군대 해산 등으로 촉발된 정미의병 운동에도 윤희순은 뛰어들었다. 윤희순은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 의병단의 사기를 북돋웠다. ‘오랑캐 원수들아, 남의 나라 침범하여 무얼 바라면서 의기양양한단 말이냐. 짐승 같은 왜놈 원수들아. (중략) 남의 나라 침범하여 너희 나라 잘될쏘냐.’ 윤희순의 안사람 의병단은 군자금 모금에도 힘을 기울였다.

경술국치 이후 윤희순 일가는 중국 만주로 이주했다. 윤희순은 만주에 학교를 세워 독립군 배출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중국인들에게 일제가 한중 양국의 원수라는 점을 부각시켰다. 윤희순의 아들 유돈상은 일제에 체포된 뒤 혹독한 고문 끝에 푸순감옥에서 숨졌다. 윤희순 역시 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숨졌다. 76세의 고령으로 아들을 잃은 슬픔을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윤희순은 조국에서 15년, 타국에서 25년을 광복을 위해 노력했다. 안사람 의병단에 가입했던 여성들도 계속 일제와 싸웠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도 광복에 앞장섰던 이들이다. 그들은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윤희순의 일대기는 만화 ‘의병장 희순’(휴머니스트)으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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