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영 역사작가백제 정벌에 나선 신라군은 660년 음력 7월 11일에 백제의 수도 사비성 앞에서 당나라 군대와 만났다. 두 군대 모두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왔는데, 신라군은 약속한 날보다 하루 늦게 도착한 참이었다.
앞서 당나라군은 13만의 대군으로 전선 1900척에 나눠 타 2, 3일 만에 한반도로 건너왔다. 이들은 덕물도(현 인천 옹진군 덕적도)와 인근 섬에 정박했다. 신라 태자 법민(문무왕)은 전함 100척을 거느리고 6월 21일 당나라군을 영접했다. 이때 법민과 당나라군의 장군 소정방은 향후 군사 일정을 약조했다.
소정방이 먼저 일정을 정했다. “나는 바닷길로 가고 대왕의 군대는 육로로 가서 7월 10일에 백제 남쪽에 다다라, 서로 만나 (백제) 의자왕의 도성을 모조리 깨부수길 원합니다.” 법민도 화답했다. “대왕은 서서 대군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장군이 왔다는 말을 들으면 필시 이부자리에서 새벽 진지를 자시고 올 것입니다.”
신라가 당나라군의 보급을 위해 배를 가져갔다고도 여겨지지만, 현실적으로 배 100척으로 13만 대군을 먹일 식량을 나르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상륙작전에 앞장설 부대를 파견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소정방은 서해안의 악명 높은 갯벌을 버드나무로 만든 돗자리를 깔아서 돌파했는데, 이런 특이한 지형에 대한 대비는 신라군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법민은 소정방과의 회동을 성공리에 마치고 돌아온 뒤 대장군 김유신, 백제 정벌군 5만 명과 함께 출전했다. 신라군은 황산벌에서 계백의 5000 결사대를 만나 격전을 치렀다. 예상치 못한 지연이었다. 당나라군과 만나기로 한 일정에서 하루가 늦어진 이유다.
소정방은 신라군이 늦은 것에 대해 화를 내며 신라의 군사 감독관이었던 김문영을 참수하겠다고 말했다. 김유신은 이에 불복하고 항의했다. “대장군이 황산벌 전투를 보지 않고 날짜에 늦은 것을 가지고 죄를 삼으려 하니, 이런 모욕은 참을 수 없다. 반드시 먼저 당나라군과 결전을 치른 후 백제를 깨뜨리겠다.”
김유신의 격렬한 항의에 당나라 군영은 당황했다. 신라군과 싸울 수는 없다고 판단한 소정방은 결국 물러섰다. 소정방은 사실 신라까지 점령하라는 밀명을 받고 온 상황이었고, 김유신도 이 점을 알고 있었다. 김유신은 백제 멸망 후에 당나라군의 경거망동을 막기 위한 철저한 대비태세를 취했다. 태종무열왕은 걱정을 하며 김유신에게 말했다. “당나라군은 우리를 위해 적과 싸웠는데 우리가 그들과 싸운다면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겠는가?” 이에 김유신은 답한다. “개도 주인이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입니다. 어려움을 만났으니 스스로 벗어나야 합니다.”
신라군의 철저한 대비로 소정방은 어쩔 수 없이 철군하고 만다. 소정방은 “어째서 신라를 정벌하지 않았느냐”는 당나라 고종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신라는 군주가 어질고 백성을 사랑하고, 신하는 나라를 충성으로 섬기며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부모처럼 섬기니 작은 나라이나 도모할 수가 없었습니다.”
신라는 당나라와 연합군을 꾸리는 전략적 선택을 했지만,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타국과의 협력과 경계, 두 과제를 동시에 안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의 우리도 변화무쌍한 국제 정세 속에서 김유신처럼 협력할 것은 협력하되, 대비할 것은 철저히 대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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