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론/정태호]계엄과 탄핵의 교훈, 개헌으로 이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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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 “국민 중심 개헌” 촉구로 불씨 다시 살려
4년 연임, 결선투표 등 이해 걸린 사안 유보
공감 형성된 의제부터 단계적인 개헌해가야

정태호 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정태호 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로 심각한 헌정 위기가 발생했지만, 우리는 헌법 절차에 따라 대통령을 탄핵하고 헌정질서를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헌법 수호 의지로 무장한 시민사회와 기민한 정치적 대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과정에서 규범으로서 헌법의 힘과 가치를 확인했다. 동시에 제왕적 권한을 가진 대통령의 일탈과 극심한 정치적 균열이 초래하는 위험성도 분명히 드러냈다. 이에 따라 “현행 대통령제의 구조적 취약성과 부작용이 임계점에 도달했다”며 개헌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그러나 정작 대선 이후 정치권의 개헌 논의는 빠르게 식는 모습이다. 새 정부 출범 이후 각종 시급한 현안들이 주목을 받고, 특검 수사에 관심이 쏠리면서 개헌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듯하다. 이러한 가운데 이재명 대통령이 제헌절을 맞아 “우리 헌법도 새로 정비하고 다듬어야 할 때”라며 “국회가 ‘국민 중심 개헌’의 대장정에 나서 달라”고 촉구한 것은 시의적절했다. 국회의장도 “개헌의 첫걸음을 떼자”고 화답했다.

국회는 개헌특위를 조속히 구성하고, 국민의 폭넓은 참여가 보장되는 방식으로 개헌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내년 지방선거와 동시에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부치기 위해선 시간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개헌은 헌법상 정치적 소수에게 저지권이 보장된 영역이다. 정치권 전반에서 합의가 형성된 의제를 중심으로 현실적 접근이 필요한 이유다. 연방제, 양원제처럼 합의가 요원한 주제나 대통령 4년 중임제, 정부 형태 변경처럼 정치적 이해가 첨예하게 엇갈리는 사안은 이번 개헌 논의에서 일단 유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대통령이 국회에 개헌을 촉구하면서 대통령 4년 연임제, 결선투표제, 총리 국회 추천제 등 정권 향배에 민감한 사안을 언급하지 않은 것은 단계적 개헌을 염두에 둔 현실적인 선택으로 평가할 수 있다.

사회적 공감대가 이미 형성된 의제는 상당하다. 기본권 목록의 보강과 현대화, 국민발안제 도입, 검사의 영장청구권 독점 조항 삭제, 배심재판 명문화, 대통령 권한의 합리적 분산과 국회의 견제 기능 강화, 지방자치권 확대 등이 그 예다. 5·18민주화운동, 부마항쟁, 6월 민주항쟁의 정신 계승을 헌법 전문에 추가하는 것은 민주화가 특정 세력의 전유물이 아닌 지역과 세대를 초월한 국민적 투쟁의 성과였음을 분명히 하는 작업이다. 국민적 지지도 높은 의제이기도 하다.

대통령 권한의 분산과 국회의 견제 기능 강화를 위한 몇 가지 핵심 과제로서, 합의 형성을 기대할 수 있는 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국가긴급권에 대한 국회의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 윤 전 대통령의 불법 비상계엄 선포는 당시 야당이 국회에서 압도적 다수를 점하고 있었기에 해제될 수 있었다. 여대야소였다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다. 헌정사에서 보듯 계엄은 본질적으로 독재화의 위험을 내포한다. 남용의 역사를 가진 남아프리카공화국, 폴란드, 헝가리 등 민주화 국가들은 헌법으로 이를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 우리 역시 계엄 선포에 국회 동의 요건 강화, 발동 기간 제한, 연장 시 정족수 상향, 제한 가능한 기본권의 한정 등을 통해 실효성 있는 견제 장치를 둬야 한다.

둘째, 고위 공직자 인사권에 대한 국회의 통제를 확대해야 한다. 현행 헌법은 국무총리 등 일부 고위직에만 국회 동의를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검찰·경찰·국정원·국세청 등 권력기관은 대통령의 인사권을 통해 사적으로 쉽게 장악될 수 있는 구조다. 반면 미국은 약 1200명의 고위 공직자가 상원의 인준을 받아야 하며, 군 장성의 진급조차 그 대상이다. 이는 대통령의 초과 권력화를 억제하고 공직자의 충성 대상이 헌법과 국민임을 재확인하는 장치다.

셋째, 정치적 중립성과 독립성이 핵심인 기관의 구성에 대해서는 국회의 동의를 요구하고, 그 정족수를 가중해야 한다. 헌법재판소장, 헌법재판관, 대법원장, 검찰총장, 국가인권위원장, 방송통신위원장, 한국은행 총재 등이 그 대상이다.

넷째, 감사원의 회계감사 기능을 국회로 이관하는 방안도 검토할 만하다. 핵심은 중립성과 독립성을 보장하는 것이다. 미국의 연방회계감사원장은 상·하원이 추천한 후보 중에서 대통령이 지명하고 상원의 인준을 받아 임명되며, 15년의 장기임기를 통해 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한다.

지금이야말로 미국의 헌법학자 브루스 애커먼이 말한 ‘헌법의 순간(Constitutional Moment)’, 곧 헌정 구조를 재정립할 역사적 기회다. 정치권이 계엄과 탄핵이라는 비극과 교훈을 헛되이 하지 않고, 다시 열린 ‘개헌의 창(窓)’을 책임 있게 활용하길 바란다.

#계엄#탄핵#개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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