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재명]과잉 입법이 만드는 부조리 규제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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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명 산업1부 차장
박재명 산업1부 차장
경제단체들이 건의하는 규제 해소 건의 내용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우리 사회가 얼마나 오랫동안 규제의 덫에 갇혀 있는지 새삼 실감한다. 얼핏 ‘지금도 그런 게 있어?’ 싶은 규제가 2025년 현재 남아 있다. 20세기 중반에 어울릴 법한 규제가 100년 뒤에도 경제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다.

대표적인 예가 연구소 설립 규제다. 기업이 연구소 세액공제를 받으려면 연구소의 네 면 벽이 모두 세워져 있어야 한다. 아무리 첨단 장비를 들여오고 인재를 모아도 벽이 없으면 연구소로 인정받지 못한다. 이는 과거 세제 혜택을 악용했던 가짜 연구소 문제를 막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정보기술(IT), 바이오, 디자인 업종은 공간을 유연하게 쓰는 오픈랩이 대세다. 전 세계 첨단 연구실들이 유리 칸막이 하나 없는 넓은 공간에서 협업한다. 그런데도 우리 법령은 여전히 벽을 요구한다. 스마트폰 시대에 회전 다이얼 전화기를 기준으로 통신망을 만들라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광고 심의 규제도 마찬가지다. 똑같은 광고라도 TV로 내보낼 땐 별다른 절차 없이 자율 심의로 통과되지만, 영화관에서 틀 때는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사전 심의를 받아야 한다. 영화관 광고는 관객들이 영화 시작 전에 선택권 없이 봐야 하므로 사전 심의를 해야 한다는 게 명분이지만, 실제론 방송법과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로 나뉜 규제 주체 이원화가 이런 모순을 만들었을 것이다.

부조리한 낡은 규제들은 왜 사라지지 않을까. 필자는 ‘규제와의 전쟁’이 벌어지던 박근혜 정부 당시 규제 해소를 담당하는 국무조정실을 출입했다. 당시 담당 공무원의 설명이 기억난다. 그는 “규제도 법이에요. 한 번 만들면 없애기 어려운 게 당연합니다”라고 말했다.

우리 사회는 모든 것을 법조문으로 통제하려는 법률만능주의 성향이 강하다. 문제가 생기면 새 규제부터 만든다. 그 결과 규제는 계속 늘어난다. 규제가 생기면 집행하고 관리할 공무원 조직과 인력이 생긴다. 정부 내에 규제의 우군이 생기면서 규제는 생물처럼 자생력을 지니게 된다.

최근 논란이 되는 ‘노란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 개정안) 역시 본래의 선한 취지와 상관없이 불합리한 규제 도입의 최신 사례가 될 가능성이 크다. 이 법은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 안대로 시행한다면 기업들은 불특정 다수 하청 근로자의 교섭 요구에 응해야 하고, 정치적 목적의 노동쟁의를 인정해야 한다. 이미 노동·산업안전·환경 분야에서 수많은 규제가 기업을 촘촘하게 얽매는 상황에서 커다란 올가미 하나가 늘어나는 것이다.

한국 경제가 다시 성장하려면 규제의 악순환을 끊는 게 첫 번째 과제다. 우리는 미국처럼 전 세계를 압박해 자국으로 기업을 끌어오거나, 중국처럼 거대한 내수를 무기로 신산업을 육성할 수 있는 국가가 아니다. 비슷한 처지의 영국은 10년 전부터 규제 하나를 만들면 기존 규제 두 개를 폐지하는 ‘원 인, 투 아웃(One In, Two Out)’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우리는 여러 차례 이 제도를 도입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아직 제대로 정착시키지도 못했다.

#규제#연구소 설립#세액공제#오픈랩#광고 심의#법률만능주의#노란봉투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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