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화학 업계가 합심해서 자발적인 사업 재편에 참여해야 합니다. 무임 승차하는 기업은 범부처 차원에서 단호하게 대응하겠습니다.”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14일 경남 거제시 한화오션 거제조선소를 방문한 자리에서 한 말이다. 글로벌 공급과잉 위기에 에틸렌 생산업체 여천NCC를 두고 공동 대주주인 한화그룹과 DL그룹이 서로의 이익을 앞세우면서 갈등을 벌이자 정부가 뒤늦게 경고에 나선 모양새다.
한국의 석유화학 산업은 지난 수십 년간 한국 수출의 견인차 역할을 해 왔다. 중국의 산업 발전에 맞춰 2010년대에는 사상 최대 실적을 내기도 했지만, 채 10년도 지나지 않아 매년 적지 않은 손실을 내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다.
이유는 명확하다. 그동안 한국 석유화학 제품의 최대 수출처였던 중국이 자급률 100%를 목표로 생산량을 급격하게 늘린 데다, 세계 시장을 무대로 되레 저가 공세를 펼치기 때문이다. 한국이 미국, 일본을 제치고 석유화학의 주도국으로 거듭난 것처럼 중국 등 후발 주자에 밀릴 것에 대비해야 했지만 ‘중국 리스크’를 덮어 뒀던 게 화를 불렀다.
준비 없이 위기가 닥치면서 기업들은 정확한 진단과 효과적인 대응보다 ‘네 탓 공방’만 벌이고 있다. 26년 동안 여천NCC를 동업해 운영하던 한화그룹과 DL그룹은 지금 남보다 못한 비방전을 펼치고 있다. 실적 악화로 인한 3000억 원의 자금 지원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기업 총수의 비공식 발언을 노출하거나 ‘모럴 해저드’ 등 경영 금기어를 내세워 비방전에 나섰다.
석유화학 산업 쇠퇴에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은 민간기업뿐 아니다. 정부 역시 한국 석유화학이 현재 위기 상황이라는 현실에는 공감하지만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가닥을 잡지 못하고 있다. 수년 동안 방관만 하다 문제가 커지자 이달 중에 석유화학 구조개편 방안을 발표하겠다고 나섰다. 그사이 업계에선 경쟁력 회복을 위한 대책 대신 다른 회사가 먼저 무너지기만 바라며 ‘버티기’에 들어갔다. 한 업체 관계자는 “위기인 걸 알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며 “우리가 먼저 넘어지지 않기만을 바라는 상황”이라고 현장 분위기를 전했다.
석유화학 업계에서는 어영부영하는 사이 구조조정의 ‘골든 타임’이 지나갔다고 보고 있다. 중국뿐 아니라 중동까지 값싼 원자재를 앞세워 생산량을 늘리고 있다. 보스턴컨설팅그룹은 현재 불황이 지속되면 3년 이내에 국내 석유화학업체 절반이 사라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남 탓과 내부 총질만 하다가는 국내 곳곳에 있는 석유화학단지들이 한국판 러스트벨트(미국의 쇠락한 공업지대)로 바뀔 수 있다.
위기 앞에서 나부터 살겠다고 덤비면 모두 무너진다. 기업과 정부가 ‘원팀’이 돼 산업구조를 재편하고 위기 극복에 나서야 한다. 정부도 기업들을 윽박지르기보단 자발적인 구조조정을 유도하는 인센티브를 마련해야 한다. 10년 전 일본도 석유화학 위기에 직면했다. 일본 정부는 구조조정에 걸림돌이 되는 공정거래법을 풀고, 독과점·담합 등의 문제를 해결하며 기업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우리에겐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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