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글 써주며 실패 통해 배우는 기회 줄어
글쓰기는 단순 기술 아닌 사유-소통의 과정
민주주의 토대인 진심-설득-숙고 약화 우려
박원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어김없이 돌아오는 마감일이면 인공지능(AI)이 대신 글을 써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상상한다. 제목과 주제만 던져 주면 기승전결이 완벽한 칼럼을 AI가 순식간에 완성해 줄 수 있으면 하고 소망하기도 한다. 어쩌면 제목과 주제까지도 자동으로 시대의 트렌드를 읽고서 반응이 좋을 내용을 미리 찾아 주면 금상첨화겠다.
그러나 부질없는 소망이다. 만약 그것이 정말 가능하다면, 비록 알량한 배움과 소박한 관점일망정 나 같은 필자가 애초에 언론 지면에 필요하지 않았겠지, 라고 생각한다. ‘일자리’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새삼 글쓰기의 괴로움 못지않은 글쓰기의 즐거움을 생각하면 이 일을 컴퓨터에 빼앗기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다. 적어도 이렇게 모순되는 마음으로 시작되는 글을 AI가 쓰지는 못할 것이라 자신한다.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꺾었던 2016년에 이어, AI가 우리 생활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챗GPT 같은 거대언어모델(LLM)들을 통해서였다. 그런 의미에서 장강명의 ‘먼저 온 미래’가 바둑과 글쓰기의 촘촘한 대위법으로 짜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AI라는 피할 수 없는 미래를 가장 먼저 경험한 것은 바둑이라는 장르이고, 바로 다음 차례는 글쓰기가 아닌가 생각되기 때문이다. AI가 바둑 프로기사들을 초월하기 시작한 순간이 왔던 것처럼, 톨스토이를 능가하는 AI 문호의 작품들이 머지않은 미래에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적어도 교육현장에서 지난 2, 3년 사이에 AI가 남긴 영향은 넓고도 깊다. 국문과 영문을 막론하고 학생들의 페이퍼가 손볼 곳 없이 매끈해졌다는 것은 가장 중요한 장점으로 꼽을 수 있겠다. 동시에 학생들의 페이퍼가 손볼 곳 없이 매끈해 더 나아질 곳이 없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단점이 아닌가 한다. 학생들이 자신들이 쓴 글과 생각의 결함을 직시하고 그것을 통해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가설에 동의한다면, 자신들이 직접 쓰지도 않은 결함 없는 글에서 배울 것이 얼마나 많을지는 의문이다. 가르치고 배우는 그 기적 같은 일이 실패와 반복 없이는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AI가 교육에 던지는 도전은 매우 근본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현장에서는 아직 AI 글쓰기를 어떻게 교육과정에 접합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있다. AI 글쓰기를 금지하자는 일부 의견은 이미 AI 탐지나 판별 기술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전면적인 금지가 과연 가능한지, 그리고 바람직한지도 의문이다. 또한 이 젊은 세대가 앞으로 살 세상에서 어차피 AI의 도움을 받는 글쓰기가 일상화될 것이라면, 제대로 잘 쓰도록 교육하는 것이 아마도 나은 접근일 것이다. 다만 우리는 아직 ‘제대로 잘’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더 큰 걱정은 글쓰기가 사유와 소통의 매우 본질적인 과정이라는 점이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며, 이를 어떻게 타인에게 설득할 것인가. 내가 타인의 생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반박할 것이며, 이것을 어떻게 다시 전달할 것인가. 글쓰기를 AI에 외주한다는 것은 이런 사유와 소통의 상당 부분을 외주한다는 의미이며, 그것은 곧장 우리 문명의 위기일 수밖에 없다.
마치 AI가 특정 입장에서 논변을 펼치다가 사용자 한마디에 순식간에 반대 입장으로 돌변할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더 이상 ‘진심’이 아니게 됐다. 어떤 가치와 진심에서 그 결론에 이르렀는지를 말하는 대신, 자신의 결론을 정당화하는 파편적인 증거들에 몰입하게 됐다. AI 언어모델들이 공통적으로 보여 주는 ‘환각(hallucination)’ 증세처럼 자신의 주장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허위 정보를 끌어오거나 아무말 대잔치를 벌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됐다. 사람들은 더 이상 진심을 다해 쓰지 않으며, 읽지 않거나 건성으로 읽게 됐다. 나는 우리가, 그리고 전 세계가 고통받고 있는 오늘날 민주주의의 퇴조 현상이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글쓰기는 근본적으로 상호작용이며, 시민들이 진심과 설득과 숙고를 나누는 장이기도 하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며 그래서 항상 나아질 여지가 있다는 것, 그래서 가장 아름다운 글은 완벽한 글이 아니라 그 어딘가 반짝이는 흠결을 머금은, 조금씩 더 나아지는 과정에 있는 글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긴다. 민주주의는 그래서 정답이 하나인 완벽한 텍스트가 아니라 다 함께 같이 쓰는 불완전한 책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19세기 초 산업혁명에 저항했던 러다이트 운동처럼 눈앞에 다가온 아니, 이미 주변을 점령한 AI가 가져온 변화에 저항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AI 시대에도 여전히 중요한 것은 내 생각을 정직하게 표현하고, 텍스트에서 타인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아닐까 생각한다. 참고로, 이 글은 AI를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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