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당시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직후인 지난해 12월 4일 서울 국회 앞에 군인들이 집결해 있다. 박형기 기자 oneshot@donga.com
손효주 정치부 기자12·3 비상계엄 사태로부터 10개월 가까이 지났지만 군은 그 여파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특히 군인들이 가장 민감해하는 진급 심사 발표가 7월 소령 진급자, 8월 말 중령 진급자 등으로 이어지면서 수면 아래 계엄 후유증이 폭발한 모양새다. 26일 대령 진급자가 발표되면 군이 또다시 크게 술렁일 것은 자명하다.
인사철이면 군은 늘 몸살을 앓았다. 진급 경쟁자에 대한 투서가 난무했고, 인사 담당자들은 진위를 가리느라 머리를 싸맸다. 투서 중엔 진급 유력 대상자가 과거 부하를 성추행했다는 식의 범죄 사실을 폭로하는 내용도 있었고, 의혹이 사실로 밝혀진 경우도 있었다.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돼 온 투서가 숨은 비위를 드러내 부적격자를 걸러내는 계기가 된 경우도 분명 있었던 것이다. 반면 ‘카더라식’ 투서가 상당수였던 역시 사실이다. 과거 군 인사를 담당했던 A 씨는 “진급 때 들어오는 투서를 다 보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번엔 그렇지 않아도 극도로 민감한 진급에 40여 년 만의 계엄이라는 초대형 사안이 더해지면서 ‘내부 저격’이 군을 뒤흔들고 있다. 특정 장교가 계엄에 적극 가담했다는 식의 제보가 군 인사 담당자는 물론이고 국회의원실이나 민간 단체, 언론 등에 빗발치는 것. 투서 내용이 사실관계 확인도 없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실명 박제되는 경우도 있다. 일단 의혹이 제기됐다는 이유로 특정 업무에서 배제되기도 한다. 장교 B는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과 근무 연이 있다는 이유로 내란 연루자라는 소문이 났다”며 “계엄과 무관하다고 해명했지만 의혹이 다 퍼져버렸다”고 했다. 군 내부에선 진위와 무관하게 일단 내란 관련 의혹 당사자가 되면 진급이 어려워질 것이라는 불안이 팽배하다.
상명하복과 내란 가담은 계엄 같은 특수 상황에선 한 끗 차이인 만큼 당시 상황이 급박해 지휘관 명령에 우선 ‘하복’한 것을 이유로 내란 가담자로 낙인찍힐 수 있다는 공포도 크다. 실제로 지난달 중령 진급자 발표가 나자 진급자 명단에 오른 일부 소령들이 계엄에 가담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이들을 진급시킨 건 국방부에 내란 단죄 의지가 없다는 증거라는 식의 비판이 나왔다. 일각에선 내란 세력이 모두 단죄될 때까지 군 인사를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과거 군 인사를 담당한 C 씨는 “계엄 관련 정보는 극도의 보안 탓에 합참의장도 배제되는 등 극소수 최고위 지휘관들만 공유했는데 무슨 수로 소령들이 계엄에 적극 가담하겠느냐”며 “영관급에서도 소령과 중령은 상명하복할 수밖에 없는 직위가 대부분인 걸 잘 알면서도 일부 장교들이 이들을 내란 가담자로 저격하는 걸 보면서 진급 지상주의의 폐해를 느꼈다”고 했다. 국방부 관계자는 “군인사법 시행령상 형사 사건으로 기소되거나 중징계가 확정되지 않은 이상 의혹만으로 진급 심사 대상에서 누락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군의 정상적인 운영을 위해 진급 심사 기간까지 수사 대상이 되지 않은 경우 평가 점수가 높으면 우선 진급시켜 놓고 영관급 기준 통상 1년 안팎인 진급 예정자 기간에 의혹이 사실로 확인되면 진급을 취소하면 된다는 설명이다.
비상 계엄의 진상은 시간이 걸려도 반드시 확인해 잘잘못을 가려야 한다. 빗발치는 투서 속에 아직 드러나지 않은 단서가 있을 수도 있다. 문제는 계엄 당시 군내 중요 직책에 있었으니 필시 가담했을 것이라는 등의 막연한 추정을 근거로 애먼 사람을 몰아가는 것이다. 무분별한 의혹 제기로 나라를 위해 수십 년간 희생한 이들이 진급에서 탈락한다면 이는 법적 문제로 비화되고, 군은 더 곪을 수밖에 없다. 장교 D는 “군인이 자신의 성과를 객관적으로 증명할 방법이 진급 외에 뭐가 있겠느냐”며 “진급에서 계속 탈락한 군인을 두고 그 복잡한 사연을 들여다보고 ‘그래도 훌륭한 군인’이라고 평가할 이들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했다. 이어 “내가 내란 가담자로 지목돼 진급에서 떨어지면 법적 대응을 해서 반드시 명예를 회복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계엄 이후 처음 단행된 이번 진급을 둘러싼 논란은 계엄 후유증이 군 조직을 얼마나 병들게 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신상필벌의 원칙을 지키는 것은 중요하다. 동시에 억울한 이가 없도록 신중한 검증이 병행돼야 하는 것 역시 명예를 먹고 사는 군인들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진급을 둘러싼 불신과 저격이 확산되면 군의 전투력과 사기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 흔들리지 않는 원칙과 공정한 인사만이 군이 계엄의 그림자를 넘어설 출발점인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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