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3월 11일 경기 파주시 적성면 무건리 훈련장에서 한미 군 장병들이 ‘한미 연합 공중강습 훈련’을 진행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윤상호 군사전문기자“국가 안보에는 여야도, 보수·진보도 없다.” 국민의 생명과 국가 안위와 직결된 안보 문제만큼은 이념과 당리당략을 초월해야 한다는 경구이지만 20여 년간 국방 분야를 취재한 필자의 경험에 비춰 보면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다.
정권의 이념적 지향점과 당리당략에 따라 중요한 안보 정책이 갈팡질팡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시작전통제권 전환도 ‘갈지자 행보’의 대표적인 사례다.
전작권 전환은 유사시 한미 연합 대북 방어 시스템의 핵심 구조를 바꾸는 작업이다. 북한의 고도화된 핵·미사일 위협에 맞서 한미 연합 방어 태세가 한 치도 약화하지 않도록 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전작권이 한국군으로 전환된 뒤에도 한미 연합군의 대북 억지력이 온전히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지상과제로 두고서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는 방식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20여 년 전 노무현 정부가 전작권 전환을 ‘군사 주권’ 사안으로 접근하면서 첫 단추부터 어그러졌다. 이후 진보 정권에서는 전작권을 ‘환수’해야 미국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국방’을 이룰 수 있다는 탈미(脫美)적 시각이 국방 안보 정책에 깊이 스며들었다. 우리 군의 능력과 전략적 실리를 제대로 따져보지 않고 전작권 전환을 서둘러선 안 된다는 비판과 우려는 설 자리가 없었다. 군 고위직 출신의 국방부 장관은 취임 첫날에 전작권 전환이 ‘시대적 요구’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급기야 전작권 전환에 찬성하면 ‘반미 진보’, 반대하면 ‘친미 보수’라는 딱지를 서로 붙이는 극심한 국론 분열로 이어졌다. 문재인 정부는 임기 내 전환을 위해 한미가 합의한 조건의 완화·변경을 추진하다가 미 측이 난색을 보이면서 동맹 균열을 빚기도 했다.
그간 진보 정권은 조속한 ‘환수’, 보수 정권은 신중한 ‘전환’을 추진하면서 가다 서다를 반복해 온 전작권 사안이 26일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뜨거운 이슈로 재부상하고 있다.
일각에선 두 정상이 주한미군 재조정 등 민감한 안보 현안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전작권 전환을 둘러싼 ‘정치적 담판’이 이뤄질 가능성이 제기된다.
가령 미국의 국방비 증액 요구를 수용하는 조건으로 한국은 전작권 전환 시기를 못 박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이달 중순 이재명 정부의 인수위원회 역할을 하는 국정기획위원회는 임기 내 전작권 전환을 국정과제로 제시한 바 있다.
가장 위험한 전작권 전환은 ‘정치적 성과’를 위한 무리한 추진이라는 데 군 안팎에선 이견이 없다. ‘능력’과 ‘여건’을 도외시한 채 ‘시간’에 쫓기는 전작권 전환은 검증 절차 및 시스템의 부실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이는 한미 연합 방위태세의 약화를 초래하고, 그 피해는 국민에게 고스란히 돌아갈 것이다.
더욱이 북한의 핵무력 고도화와 북-러 군사 협력 및 중-러 군사 공조의 가속화 등으로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안보 지형은 날로 엄중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동맹의 불확실성을 자초하는 전작권 전환은 한미 양국의 국익을 해치는 자충수가 될 수 있다.
제이비어 브런슨 주한미군사령관(대장)이 이달 초 기자간담회에서 “전작권 전환에 ‘지름길(shortcut)’을 택할 경우 한반도 군사 대비 태세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며 “단지 (전작권 전환이) 완료됐다고 말하기 위해 서두르는 것은 한미 모두에 이롭지 않다”고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전작권 전환이 한미동맹의 약화로 비치는 순간 동맹의 억제력이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사석에서 만난 군 고위 관계자는 “전작권을 돌려받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어선 안 되고, 받아서 잘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자강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정치적 수사보다 냉정한 전략이, 감정보다 이성적 판단이 전작권 전환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작권 전환은 전쟁 억제와 국가 생존과 직결되는 중차대한 안보 사안이다. “주권 회복”이라는 구호만 외치며 ‘묻지마식 전환’을 주장하는 것은, 국가안보의 복잡성과 동맹 현실을 외면한 무책임한 태도다.
전작권 전환의 핵심은 ‘시기’가 아닌 능력 완비를 위한 ‘절차·방식’이고, 전환의 최우선 목적은 한국군 주도의 새 연합방위 체제를 통해 대북 억지력을 업그레이드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 군은 ‘하드웨어’(무기 전력 등)와 ‘소프트웨어’(전쟁 기획 능력 등) 모두 철저한 전략적 준비를 갖춰 나가야 한다. 그 반대의 길로 나가면 국가안보를 건 ‘도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작권 조급증’은 안보에 아무런 득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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