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223회 수면제 투약한 환자도… 가족들 “화학적 구속, 부작용 우려”
의료계 “치매-섬망환자 돌발 행동… 사고 위험 커 처방 많을 수밖에”
“양질 간호 위해 간병비 지원해야”
이모 씨(56)는 최근 아버지를 모신 요양병원에서 “수면제를 투약해야 할 것 같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버지가 밤에 자주 깨어 소리를 지르거나 욕설을 하는 등 섬망 증세가 있어 수면제 투약이 불가피하다는 설명이었다. 이 씨는 “함께 병실을 쓰시는 다른 분들을 위해서라도 수면제를 써야 한다는 걸 이해하지만, 투약 빈도가 너무 잦아지면 건강에 해롭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했다. 치매 환자 보호자들이 모인 인터넷 카페 등지에는 “요양병원에서 수면제를 쓰겠다는데 괜찮은 건가”, “면회를 가면 주무시기만 하는데 보호자 몰래 수면제를 주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된다”는 등의 글이 적지 않게 올라오고 있다.
요양병원이 환자 1명당 처방하는 수면제의 양이 일반 병원의 20배에 이르는 것으로 확인됐다. 수면제 없이도 증상 호전이 가능한 환자들에게까지 무분별하게 수면제를 처방하는 사례가 있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돼 온 가운데 요양병원의 수면제 처방이 일반 병원보다 월등히 높다는 점이 확인된 것이다.
● 환자 1명당 223회 꼴로 투약한 요양병원도
3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서미화 의원실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전국 요양병원 중 수면제(최면·진정제) 처방량이 많은 100개 기관에선 지난해 총 146만2272건의 수면제 처방을 했다. 이 병원들에서 수면제 처방을 받은 적 있는 환자는 총 1만1952명이다. 환자 1명당 평균 122.35건이 처방된 셈이다.
이는 일반 병원 상위 100곳에서 환자 1인당 처방한 수면제 양(5.56건)의 22배 수준이다. 상대적으로 더 증세가 위중한 환자들이 치료를 받는 종합병원(6.45건)과 상급종합병원(6.56건)과 비교했을 때도 요양병원에서의 1인당 수면제 처방 건수가 19배 수준이었다.
요양병원들 사이에서도 수면제 처방량 편차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수면제를 가장 많이 처방한 경기 A요양병원의 경우 지난해 환자 54명에게 1만2046건의 수면제를 처방했다. 이 병원에선 환자 1명이 한 해 동안 평균 223번 수면제를 처방받았다는 뜻이다.
서 의원은 “위중한 환자들이 있는 상급종합병원보다 요양병원에 계신 어르신들이 더 많은 수면제를 처방받는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며 “심각한 부작용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 만큼 수면제의 남용 실태를 면밀히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 “화학적 구속” vs “환자 위해 불가피한 선택”
상황이 이렇다 보니 요양병원에 노부모를 모신 자녀들은 부모님이 과도한 수면제 처방에 노출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 2021년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요양병원에서 어머니에게 ‘잠자는 약(수면제)’을 과다 처방해 뼈가 드러날 정도로 심한 욕창이 생겼다”며 “팔순 어머님을 ‘화학적 구속’한 것”이란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의료계에선 대부분 다(多)인실로 운영되는 국내 요양병원의 여건상 수면제 처방이 많을 수밖에 없다고 토로한다. 경기 북부에서 요양병원을 운영했던 의사 B 씨는 “치매나 섬망이 있는 환자가 야간에 돌발 행동을 하면 다른 환자들에게까지 피해가 갈 뿐만 아니라, 환자 본인이 낙상 사고를 당할 우려도 커진다”고 했다. 경기 남부의 다른 요양병원장은 “상급종합병원은 환자들이 통상 1, 2주 입원하지만 우리는 수개월씩 지내기 때문에 환자당 처방 건수가 많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수면제 처방을 줄이기 위해선 인력 구조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백종우 경희의료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요양병원에서 환자들이 하루 종일 누워만 있으면 불면 증세가 심해지기 쉽다. 이를 방지하려면 낮 시간에 야외 활동이나 재활 프로그램을 늘려야 하지만 현재 요양병원 인력 사정으론 쉽지 않다”고 했다. 울산의 한 요양병원장은 “간병비 지원을 통해 양질의 간호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하고, 수면제 사용을 줄이는 요양병원에 인센티브를 지급하는 등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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