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APEC 폐막]
21개국 만장일치 선언문 나왔지만… ‘자유무역 수호’ 놓고 美中 줄다리기
밤샘협상 옥신각신하다 절충점 찾아… 정상선언선 빼고 각료 성명만 반영
美中 동시 참여 ‘AI 협력’ 문서화
APEC 정상들, 한복 목도리 두르고 폐막 기념촬영
이재명 대통령이 1일 경북 경주 화백컨벤션센터(HICO)에서 열린 2025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참석한 각국 정상들과 한복 소재로 만든 목도리를 두르고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왼쪽부터 앤서니 앨버니지 호주 총리, 하사날 볼키아 브루나이 국왕,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 가브리엘 보리치 칠레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이 대통령, 프라보워 수비안토 인도네시아 대통령,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 안와르 이브라힘 말레이시아 총리, 크리스토퍼 럭슨 뉴질랜드 총리,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 뒷줄 왼쪽부터 존 리 홍콩 행정장관, 존 로소 파푸아뉴기니 부총리, 알렉세이 오베르추크 러시아 부총리, 로런스 웡 싱가포르 총리, 아누틴 찬위라꾼 태국 총리, 르엉끄엉 베트남 국가주석,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 테레사 메라 페루 통상관광부 장관, 마르셀로 에브라르드 멕시코 경제장관, 린신이 대만 총통 선임고문. 대통령실 제공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1일 폐막식에서 21개 회원국이 만장일치 합의로 정상 공동 문서인 ‘경주 선언’을 채택했다. 경주 선언에는 다자주의와 자유무역을 확산하는 APEC 설립 취지에 따라 공동선언문에 포함돼 왔던 ‘다자무역 체제 지지’라는 표현이 빠졌다. 자국우선주의와 보호무역 기조 확산 속에 미국의 반대 목소리가 반영된 것. 다만 의장국인 한국이 제안한 ‘인공지능(AI) 이니셔티브’와 ‘인구 구조 변화에 대한 APEC 협력 프레임워크’가 채택된 것은 성과로 꼽힌다. 미국과 중국이 국제기구에서 채택한 AI 공동문서에 함께 참여한 것은 처음이다. 대통령실은 “이번 정상회의를 통해 APEC은 포용적이고 지속가능한 성장, 혁신을 통한 번영, 인류 공동의 미래 대응력 강화라는 공동 목표를 향한 협력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 것”이라고 평가했다.
● ‘자유무역’ 빠진 경주 선언
경주 선언은 글로벌 무역 불확실성, 기술 발전, 인구 변화 같은 글로벌 과제들에 대해 회원국 간 경제협력을 강화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재명 대통령은 1일 기자회견에서 “개방적이고 역동적이며, 평화로운 아태 공동체를 향한 APEC의 중장기 미래 청사진을 담았다”며 “혁신을 통해 신성장 동력을 창출하고, 성장의 과실을 고루 나누는 포용적 성장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고 밝혔다.
경주 선언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세계무역기구(WTO) 등 다자무역에 대한 지지를 담은 표현으로 대폭 축소됐다는 점이다. 지난해까지 APEC 정상 선언에 빠짐없이 담겼던 “WTO를 핵심으로 하는 규칙 기반의 다자간 무역 체제”에 대해 지지한다는 표현이 빠진 것.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 WTO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을 비판하면서 WTO 탈퇴를 약속한 바 있다.
그 대신 경주 선언에는 ‘AEPC 푸트라자야 비전 2040’ 달성을 위해 지속적으로 나아가자는 내용은 포함됐다. 2020년 채택된 ‘푸트라자야 비전 2040’은 2040년까지 달성하고자 하는 APEC의 목표를 제시한 것으로 “WTO 규범에 대한 우리의 지지를 재확인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날 함께 발표된 APEC 외교통상합동각료회의(AMM) 공동성명에는 “우리는 무역 현안을 진전시키는 데 있어 WTO의 중요성을 인정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역대 APEC 선언마다 담겼던 WTO에 대한 언급이 빠지고 자유무역에 대한 표현 수위도 약해졌지만 통상 질서를 놓고 미중이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는 상황에서 합의를 도출한 것 자체가 유의미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무 협상 단계부터 WTO 관련 문구를 삭제하길 원한 트럼프 행정부와 이를 포함할 것을 요구하는 중국이 대립각을 세우면서 문안 조율에 난항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트럼프 행정부 1기였던 2018년 파푸아뉴기니 APEC 회의에서 미중 갈등으로 공동선언 채택이 불발된 사례가 재연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외교부에 따르면 경주 선언이 최종 타결된 것은 폐막일인 1일 오전 7시 반경. 미국이 AMM 공동성명에 WTO에 대한 문구를 포함시키는 것에 합의하는 대신 중국이 경주 선언에서 WTO에 대한 지지 표현을 제외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절충안에 합의한 것이다. 대통령실은 “정상회의 당일까지 문안 타결을 위해 밤샘 협상을 진행하며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APEC 회원국 간 입장 차이를 중재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밝혔다.
● 미중 동시 참여한 첫 AI 공동 문서 채택
이번 경주 선언에 우리 정부가 주도한 ‘문화창조산업’ 의제를 담은 것은 성과로 꼽힌다. APEC 선언에 ‘문화창조산업’이 담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날 ‘APEC AI 이니셔티브’와 ‘APEC 인구구조 변화 대응 공동 프레임워크’ 등도 경주선언과 함께 채택했다. 대통령실은 “APEC 정상 차원 최초로 AI·인구·문화창조산업에 대한 공동인식 및 협력 방향을 제시했다”며 “향후 우리 K컬처가 아태 지역 내 성장동력으로 자리 잡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라고 평가했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합의문 도출을 통해 아태 지역 다자주의의 불씨를 살렸다는 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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