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할퀸 ‘괴물 폭우’]
경남 산청, 폭우-산사태 10명 사망
“장대비 5분만에 암자 주변 휩쓸려”… 화장실 가다, 마당에 있다 매몰돼
도로 곳곳 끊겨 소방 출동도 지체
폭우 산청, 초유의 전 군민 대피령… 3월 막대한 산불 피해 이어 수해
“30m 앞에서 ‘살려주이소, 좀 살려주이소’ 소리쳐서 어찌든 도울라꼬 움직이려는 찰나에 산 한 개만 한 흙더미하고 바위가 확 몰아쳐서 계곡 따라 쏟아지더니 그 자리 집을 그냥 통째로 쓸어가뿌리는기라.”
20일 오전 8시 반경 경남 산청군 산청읍 내리마을 산사태 현장 인근에서 만난 황산 스님(62)이 전날 산사태로 이웃 주민들을 상당수 잃었다며 망연자실했다. 그는 “장대비가 쏟아진 지 5분도 안 돼 암자 옆 컨테이너와 집채만 한 바윗덩어리가 토사에 휩쓸려 수십 m 떠내려갔다”며 “좀 시간이 있었다면 이웃들이 그렇게 허망하게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산청에선 이번 폭우로 총 10명이 사망하고 4명이 실종됐다.
시신 수습하는 소방대원들… 캠핑장선 일가족 매몰 20일 경남 산청군 산청읍 부리마을에서 소방 관계자들이 전날 산사태로 실종된 70대 여성의 시신을 수습하고 있다(위쪽 사진). 경기 가평군 조종면에서 이날 오전 발생한 산사태로 다리가 끊겨 캠핑장이 고립된 모습. 이 캠핑장에선 일가족 3명이 매몰돼 40대 아버지가 숨졌고, 어머니와 자녀는 실종됐다. 산청=박형기 기자 oneshot@donga.com·가평=뉴스1
● 눈앞에서 ‘살려 달라’고 하는데도 못 구해
이날 오전 찾은 내리마을은 산사태 당시 처참한 상황 그대로였다. 매몰 주택 마당에는 흰색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1대가 찌그러져 있었고, 집은 포탄을 맞은 듯이 한중간이 움푹 파인 상태였다. 마당엔 성인 무릎 높이의 펄이 가득해 발이 쉬이 빠지지 않을 정도였다.
내리마을에선 전날 오전 10시 46분경 산사태로 주택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해 40대 남성 1명과 70대 여성이 숨진 채 발견됐다. 사망한 여성의 남편인 70대 남성만 대피할 곳을 찾기 위해 이동했다가 구조됐다. 사망자는 장모와 사위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사망자들은 갑자기 벌어진 산사태에 미처 피할 새도 없이 휩쓸렸다. 한 주민은 “1명은 화장실을 향하던 길에, 마당에 있던 다른 1명은 허리 높이까지 몸이 빠친 채로 빠져나오려다 미처 움직일 수 없게 돼 매몰됐다”고 말했다. 산사태로 도로 곳곳이 끊기며 소방당국이 제때 출동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주민들은 “소방대원들이 우회로로 빙빙 돌아오는 동안 살아남은 사람들은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한 주민은 “‘살려 달라’는 소리가 들리는데도 구할 수 없어 마음이 찢어졌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 759mm 비, 사상 첫 ‘전 군민 대피령’ 내렸지만…
이날 역시 산사태 피해를 입은 산청읍 부리 내부마을도 곳곳에 진흙과 건물 잔해가 가득했다. 도로와 교량은 끊겨 흡사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이 마을에서는 축사를 운영하던 70대 부부가 사망했다. 인근 부모님 식당에서 부모님을 도우며 작가를 꿈꾸던 20대 여성도 숨졌다. 강민정 씨(53)는 “돌아가신 분들 모두 들어봤거나 아는 사람들이다. 특히 한 분은 어제까지도 ‘옷이 예쁘다’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눴던 사람인데 갑작스레 돌아가시니까 너무 허탈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산청에는 16일부터 4일간 지난해 전체 강수량의 절반이 넘는 759mm의 비가 내렸다. 군은 산청읍에서 산사태가 난 직후인 오후 ‘전 군민 대피령’을 내렸다. 단일 지방자치단체가 관할 전 지역을 대상으로 대피를 권고한 것은 처음이다. 소방당국은 전날 오전 10시 20분에 대응 1단계를 발령했다가 1시간 뒤 2단계를, 같은 날 오후 1시부터는 국가소방동원령을 발령해 피해 수습에 나서고 있다.
일각에선 전 군민 대피령을 내리기 전에 이미 사망자 및 실종자 다수가 발생한 상황인 점을 근거로 늑장 대응이라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주민 대피령은 19일 오후 1시 50분경 내려졌지만 이미 산청읍에선 산사태로 사망자가 발생한 이후였다.
● 3월 화마-7월 수마 겹친 산청군
3월 역대 최악의 산불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산청군은 넉 달 만에 수마로 큰 피해를 입으면서 군 전체가 큰 실의에 빠졌다. 1600여 가구, 2100여 명이 임시 대피소에 머물고 있다. 산불로 산림이 훼손되고 나무를 베어내면서 수마 피해가 커졌다는 지적도 나왔다.
시천면에서 만난 주민 손경모 씨는 “올봄 산불 때문에 마을 전체가 아직도 난리도 아닌 상황인데 비 피해까지 갑작스레 닥치니 마을 주민 전체가 한마디로 ‘멘붕’(멘털 붕괴)인 상태”라고 말했다. 이날 오전 산청읍 내리마을 앞에서 만난 60대 주민은 “산청에 평생 살면서 한 해에 불난리와 물난리가 동시에 난 것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은 것도 처음”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산청읍 주민 송모 씨(63)는 “눈앞에서 사람이 살려 달라고 하는 걸 보고 트라우마에 걸려서 정신안정센터로 가신 분도 계시고 지체장애인인 주민이 가까스로 소방대원의 도움을 받아 탈출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