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 강남은 산업 밀집되던 영등포… 영등포 동쪽 ‘영동’이 지금의 강남
김연자-김재박-한대화가 띄운 잠실… 첫 프리미엄급 여의도 시범아파트
큰비만 오면 침수됐던 ‘망리단길’… 지금은 젊은이와 외국인의 ‘핫플’
1980년 구반포 및 신반포 아파트. 반포 주공1단지 준공 이후 강남 개발이 본격화했다. 영동지구 일대 약 860만㎡(약 260만 평)이 아파트 지구로 지정됐다. 경기고교를 필두로 강북 10여 개 중고교가 강남으로 이전했다. 남산3호터널이 개통됐고 강남고속터미널이 생겼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아카이브
《궁금하다 생각했지만 그냥 지나쳤던, 하지만 알아두면 분명 유익한 것들이 있습니다. 역사적 사건일 수도 있고 최신 트렌드일 수도 있죠. 동아일보는 과학, 인문, 예술, 역사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오∼ 이런 게 있었어?’라고 무릎을 칠 만한 이야기들을 매 주말 연재합니다. 이번주는 마지막 도시편입니다.》
한국 도시를 얘기하려면 서울을 빼놓을 수 없다. 수도이자 933만 명이 사는 유일한 특별시다. 외국인이 방문하고 싶어 하는 세계적인 도시다. 우리 국민에겐 기회의 도시다. 누구에겐 재경(在京), 상경(上京)이 인생 목표다. 전국의 좋다는 생산품 가운데 특급만 서울로 와서 다 팔린다. 사회기반시설이나 교육 환경도 월등하다. 서울은 어떻게 끊임없이 발전하면서 독보적인 경쟁력을 갖게 됐을까.
● 최초의 ‘강남’?… 원래는 OO스타일!
서울 변천사에서 강남을 빼놓을 수 없다. 강남(江南)은 한강 남쪽이다. 한강 이남이 서울이 된 것은 불과 90여 년 전이다. 조선 시대 서울인 한양은 북쪽 숙정문, 남쪽 숭례문, 동쪽 흥인지문, 서쪽 돈의문 등 4대문 안쪽만 일컬었다. 현재 종로구와 중구 정도다.
1930년대 서울 인구가 40만 명에 접어들자 지금의 마포구 서대문구 성동구 동대문구 용산구 성북구 일부가 경성부(서울)로 편입됐다. 그래도 감당이 안 되자 한강 이남까지 넓어졌다.
최초의 강남은 영등포다. 1936년 영등포는 경기 시흥군 영등포읍이었다. 당초 여의도와 노량진 등이 편입될 예정이었으나 영등포로 방향을 틀었다. 영등포에는 경인선과 경부선 철도가 지나가는 역이 있어 유동인구가 많고 물적 교류가 활발했다. 자연스럽게 자급자족형 산업지역이 형성됐다. 읍 차원의 도시 발전 계획까지 있었다고 한다.
1930년 발간 ‘경성시가지계획 평면도’. 짙은 노란색이 신흥 경성부 지역이다. 한강 이남으로 지금 영등포 일대만 편입됐다. 1936년부터 광복 이전까지 영등포에 토지구획사업이 실시됐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아카이브요즘도 서울 강남 지역 상점 등 간판에서 ‘영동’을 흔히 볼 수 있다. 한강 다리 가운데 영동대교도 있고 영동중고교도 있다. 이 영동은 ‘영등포 동쪽’을 뜻한다.
1960년대 들어 농촌에서 서울로 인구가 폭발적으로 유입되면서 서울은 더 넓어져야 했다. 1962년 서울특별시·도·군·구의 관할구역 변경에 관한 법률이 제정돼 경기 광주군 언주면, 중대면, 구천면 일부가 서울로 편입된다. 이 지역이 영동지구이자 최초의 강남이다.
현재 강남구 압구정동은 언주면 압구정리였다. 배나무 과수원이 많았다. 도곡동은 언주면 양재리로 도라지가 특산물이었다. 언주면 포이리는 현재 개포동이다. 여기서 난 과일과 채소는 남대문시장이나 동대문시장에서 유통됐다.
영동지구는 이후 서울 부도심 개발 대상에 포함되면서 천지개벽이 일어났다. 현재 전국에서 부동산값이 가장 비싼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다. 1969년 용산구 한남동과 강남구 신사동을 잇는 한남대교(제3한강교)가 완공되고, 한남대교 남단 도로가 경부고속도로 기점이 되면서 ‘강남 르네상스 시대’에 탄력이 붙게 된다.
● ‘트로트 대모’ 김연자가 잠실을 노래했다?
영동지구에 속했지만 현재 강남구처럼 대표 부도심이 되리라고 기대하지 않던 곳이 송파구다. 올해 7월 기준 송파구 인구는 약 65만 명으로 전국 특별시 및 6개 광역시의 69개 자치구 중 가장 많다.
송파구 잠실(蠶室)동은 실을 얻기 위해 누에를 기르던 곳이다. 조선 시대부터 1950년대까지 잠실은 뽕나무를 심어 뽕잎을 먹는 누에를 키웠다. 서울 동쪽이라고 해서 동(東)잠실로 불렸다. 현재 서대문구 연희동에 서(西)잠실이, 서초구 잠원동에 신(新)잠실이 있었다.
잠실에 가장 먼저 주공아파트(1∼5단지)가 지어졌지만, 1981년 서울이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되기까지 발전했다고 말하기는 애매했다. 이 지역 주민들의 생활필수품 가운데는 장화가 빠지지 않았다. 비만 오면 땅이 질척댔기 때문이다.
지역 유물과 유적도 방치됐다. 1980년대 후반까지도 송파구 석촌동 289-3번지 놀이터에 있던 ‘삼전도비(三田渡碑)’를 학생들이 밟고 올라탔다. 사적 101호인 삼전도비는 조선시대 인조가 병자호란 때 청나라 황제에게 항복했던 자리에 세운 굴욕의 유물이다. 1963년 사적으로 등록됐지만, 2010년 3월에야 고증을 통해 원래 자리인 잠실동 47번로 옮겨졌다.
1988년 서울 송파구 잠실동 석촌호수변에 들어선 롯데호텔 월드. 이듬해 복합쇼핑몰과 테마파크까지 개장한다. 출처 서울역사박물관 아카이브19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잠실야구장과 서울올림픽주경기장, 잠실체육관 등이 속속 개장했다. 1985년에는 복합쇼핑몰과 테마파크, 호텔 등으로 이뤄진 롯데월드가 석촌호수 옆에 들어설 준비를 시작했다. 그 밑으로는 1980년 10월 개통한 지하철 2호선 잠실역이 있었다.
잠실야구장은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통해 ‘스포츠 메카’가 됐다. 한국 야구 최고 명장면이 나왔다. 숙적 일본과의 대결에서 김재박의 ‘개구리 번트’에 이어 TV 중계방송을 하던 김용 캐스터의 ‘쳤습니다. 좌측. 홈런이냐’라는 함성과 함께 한대화의 3점 역전 홈런이 터졌다. 첫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이 잠실벌에서 이뤄졌다. 이날 완투승을 한 고려대 2학년 투수 선동열은 국보급 투수가 됐다. 1985년 가수 김연자는 ‘잠실야구장’이라는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은 ‘잠실’을 흥얼거렸다.
1986년 아시아경기에 이어 서울올림픽 개·폐막식과 주요 경기가 열리면서 잠실은 세계로 알려졌다. 1980년대 보성고 배명고 정신여고 창덕여고 같은 강북의 이름 있는 고교가 송파구 잠실동과 삼전동, 방이동으로 와서 ‘강남 8학군’의 한 축을 형성했다. 순식간에 호재들이 쏠리면서 부동산 가격이 크게 올랐다.
●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안내원이 있었다?
서울의 변화를 얘기하면서 아파트가 빠질 수 없다. 수십 년간 재산 가치가 계속 커지면서 입주 경쟁이 여전히 치열하다. 전 세계 어디를 봐도 드문 현상이다.
아파트는 197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서울에 들어섰다. 처음에는 마당도 없고 계단도 올라야 하며, 층간 소음도 있어 여러 모로 불편하다는 인식이 컸다. 초반에는 미분양이 많았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도 그랬다.
특별한 공간이 있는 아파트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장독을 두는 곳이 있는 아파트가 대표적이다. 1971년 정부 주도로 건설된 영등포구 여의도 시범아파트에는 장독대 전용 공간이 추가됐다. 당시 가정집에선 김치와 간장 고추장 된장을 직접 담가 항아리에 보관했기에 장독대가 필수였다. 그런 요구를 반영한 것이다.
여의도 시범아파트 엘리베이터 안내원. 채널A 제공여의도 시범아파트는 프리미엄 아파트의 시초다. 한강을 바라보는 12층 건물 24개 동의 1584세대가 사는 대단지였다. 당시 흔하지 않던 현대식 욕조, 양변기, 싱크대가 갖춰졌고 중앙 난방 시스템이었다. 무엇보다 아파트 최초로 엘리베이터가 각 동마다 2대씩 들어왔다. 엘리베이터를 처음 타 보는 입주민이 많아서 초기에는 안내원 98명이 24시간, 3교대로 안내했다. 수요가 폭발했다. 여의도에는 시범아파트에 이어 은하, 삼익, 목화 아파트가 지어졌는데 분양하자마자 완판됐다. ‘아파트 신화’의 시작이다.
아파트 입주 경쟁이 치열해지자 정부는 1977년 주택청약제도를 도입했다. 아파트를 사고 싶어도 돈이 없는 서민을 배려한 제도였다. 청약통장을 가진 무주택자에게 아파트 분양 우선권을 줬다. ‘열심히 살면 내 집 하나 가질 수 있다’ 는 희망이 생겼다.
무주택자 청약 통장을 매매하는 부작용이 생겼다. 정부는 아파트 청약에 까다로운 조건을 붙였다. 1970년대 말 아파트 청약 조건 1, 2순위가 되기 위한 조건 중에는 ‘영구 불임 시술을 한 자’가 들어갔다. 인구가 급증하다 보니 산아 제한을 청약 조건에 넣어 버렸다. 실제로 좋은 아파트를 분양받기 위해 불임 시술을 받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1976년 한 해 8만 명 정도였던 영구 불임 시술자는 청약제도 시행 이후인 1977년 8월, 14만 명까지 늘었다. 이 제도는 20년간 유지됐다.
아이러니하게도 2000년대 중반에는 저출산이 문제가 되면서 다자녀 가구 특별 공급 제도가 생겼다. 오랜 기간 무주택이었고 부양가족이 많을 수록 청약 점수를 높게 받는 방향으로 제도는 바뀌었다.
● 단골 ‘침수 동네’가 핫플레이스로
낙후된 지역의 재탄생도 서울만의 경쟁력이다. 마포구 망원동은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6·25전쟁 피난민과 도심 개발에 밀려난 서민들이 모인 속칭 ‘뚝방촌’이었다. 하수도 개발이 덜 돼 비만 많이 오면 둑방을 넘어온 물과 각종 쓰레기에 마을이 잠겼다. 1984년 9월 서울 집중호우 때는 유수지 제방이 무너져 홍수가 나서 5000여 가구 이상이 침수됐다. 주민들은 서울시와 국가를 상대로 한 기나긴 손해배상소송 끝에 이겼다. 이후 마을이 새롭게 변신했다.
현재 망원동 일대는 상습 침수 구역이라는 수식어를 지우고 젊은이와 외국 관광객의 ‘핫플레이스’가 됐다. 망원동 주택 사이사이 자리 잡은 카페와 식당이 상권을 형성한 ‘망리단길’ 인기는 하늘을 찌른다. 과거와 현재 풍경이 교묘하게 섞여 있다. 레트로(복고) 감성을 현대적으로 가공해 즐기는 새로운 복고, ‘뉴트로’ 열풍의 도화선이 됐다. 주변 전통시장과 한강으로 이어지는 거리마저 함께 들떴다. 비슷하게 재생된 용산구 경리단길과 해방촌, 이태원 우사단길, 광진구 성수동, 송파구 송리단길 등과 함께 서울의 힙한 거리가 됐다.
언제나 변신 중인 서울의 도시 경쟁력은 어느 정도일까. 지난해 말 발표된 ‘세계 도시 종합경쟁력지수(GPCI)’에서 6위에 올랐다. 서울 앞에는 영국 런던, 미국 뉴욕, 일본 도쿄, 프랑스 파리, 도시국가 싱가포르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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