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문화의 힘, 교육으로 체계화해야
K팝 연습생 훈련도 학력 인정 필요
현장 연계된 K컬쳐 지역별 특화해
‘데뷔 실패=인생 실패’ 인식 없애야
이혜정 교육과혁신연구소 소장
몇 년 전 국내 최정상급 엔터테인먼트 회사로부터 흥미로운 자문 요청을 받았다. K팝 연습생교육 이슈였다. 핵심은 두 가지였다.
먼저, K팝 스타를 꿈꾸는 많은 청소년은 혹독한 훈련을 받는 연습생 생활을 하는데 이 과정이 학력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연습생은 학교를 다니지만 회사에서 사실상 진로 집중 교육을 받기 때문에 공부를 하기 어렵다. 데뷔에 성공하면 다행이지만 이는 극소수다. 데뷔하지 못하는 대부분 연습생은 대학 진학이나 다른 진로 모색이 힘들다. 이를 어떻게 개선할지 고민이라고 했다.
둘째, 글로벌 수요를 수용할 제도적 기반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 회사가 연습생을 공개 모집했는데 순식간에 전 세계에서 수천명이 지원했다. 문제는 외국인 청소년을 받아들일 교육 인증 시스템이 없다는 것이다. 외국인 학생들은 한국 학교에 다니기 어렵다. 회사 자체 교육만으로는 학력 인정이 되지 않는다. 역시 데뷔를 못하면 진로가 애매해진다.
사정은 e스포츠도 다르지 않다. 한국은 세계적인 프로게이머 ‘페이커’ 이상혁을 배출한 e스포츠 강국이다. 그러나 e스포츠 훈련은 사설 아카데미에 의존할 뿐 국내에서 정식 학력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이 난제를 풀 실마리가 있다. 바로 국제 바칼로레아(IB) 직업 고교 프로그램(CP)이다. IB CP는 대학 진학을 위한 인문계 고교 프로그램인 IB 디플로마(DP) 교과 중 두세 과목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직업 현장과 연계된 커리큘럼을 택하는 융합형 교육 과정이다.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는 정보기술(IT) 분야 IB CP 커리큘럼을 운영해 학생들이 실제 산업 현장에서 필요한 기술을 배우도록 지원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세계 최초로 K팝과 e스포츠 분야의 특화된 CP를 개발할 수 있다.
한국은 2019년부터 초중고 IB 프로그램을 한국어화해 공교육에 도입해 현재 전국 12개 시도 교육청에서 운영 중이다. 고교 과정인 DP 졸업생들은 지난해와 올해 국내외 대학 진학에서 우수한 성과를 보였다. DP가 성공적으로 정착한 만큼 CP 도입 기반은 충분하다.
한국이 K팝과 e스포츠 특화 CP 학교를 설립한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K팝 CP를 운영하는 학교에서 엔터테인먼트사 훈련 과정이 정규 커리큘럼으로 인정된다면 연습생 과정이 학력으로 공인된다. 데뷔에 실패하더라도 CP 고교 학력으로 국내외 대학 진학이 가능해진다. e스포츠 CP 학교에서는 프로게이머 훈련과 경기 데이터 분석, 게임 콘텐츠 제작 같은 다양한 훈련 과정이 학력으로 인정될 수 있다.
국제 공인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전 세계에서 온 학생들도 각각 자국 대학 진학이 가능해진다. 한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이들은 자기 나라에서 친한(親韓) 인재로 성장해 한국 문화의 전도사가 될 확률이 높다.
최근 미국 빌보드 메인 싱글차트 ‘핫 100’ 1위를 차지한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노래 ‘골든’을 작곡한 이재는 한국 국제학교에서 IB DP 음악 과목을 심화 수준으로 이수했다. 10년간 SM 연습생 생활 끝에 데뷔를 못했음에도 작곡가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는 체계적인 IB DP 음악 교육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지금이야말로 K팝을 넘어 K드라마, K영화, K뷰티, K요리까지 넓어진 K컬처 특화 학교를 국제 공인 교육 체제로 설립할 적기다. ‘K컬쳐’ 교육 허브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는 연습생을 비롯한 청소년에게는 데뷔 실패가 곧 인생 실패는 아니라는 인식을 갖게 하는 사회안전망으로 작용할 수 있다.
K컬쳐 교육 허브 구축은 수도권 집중 완화 해법이 될 수도 있다. 지역별 특화 전략을 통한 지역 균형 발전을 기대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도시 부산에는 K영화 CP 학교를, 제주에는 관광과 연계한 K뷰티와 K요리 복합 캠퍼스를, 광주에는 문화·예술 인프라를 활용한 K드라마 및 뮤지컬 학교를 설립하는 식이다.
K컬쳐 허브 구축을 위해서는 제도 개선이 선행돼야 한다. 대학생 이상 외국인에게만 발급하는 학생비자를 외국인 초중고생에게도 발급해 이들이 국내에서 합법적으로 공부할 수 있어야 한다. 캐나다는 캐나다 국민은 무상 교육이지만 외국인에게는 학비를 받아 교육 재정을 충원한다. 이를 위해 외국인 초중고생에게 적극적으로 비자를 발급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외국인 학생에게 적정 학비를 받아 내국인 교육 환경을 개선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다.
지금은 세계의 K컬처와 e스포츠 수요를 제도적으로 흡수할 골든타임이다. 정부도 K문화의 세계적인 성공을 국가 전략 자산으로 인식하고 있다. K문화 교육 허브 구축은 대한민국 미래를 좌우할 국가 전략 사업이 될 수 있다. 한국을 주목하는 세계에 우리가 답할 차례다.
이혜정 소장: 이화여대 화학과 졸업, 서울대 교육학과 교육공학 석·박사 서울대 연구교수, 미국 미시간대 객원 교수, 일본 훗카이도대 특임 부교수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