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의 한 공영주차장에 전기차 화재 대비 리튬이온배터리 전용 소화기가 설치돼 있다. 뉴스1
국가 전산망 마비 사태를 불러온 국가정보자원관리원(국정자원) 화재 당시, 직원들이 리튬이온 배터리에 효과가 없는 ‘할론 소화기’로 자체 진화를 시도한 것으로 30일 확인됐다. 결국 초기 불길을 잡지 못하면서 피해가 일파만파로 번졌다. 정부가 배터리 화재용 소화기 기준을 내놓은 지 9개월이 지났지만 이를 통과한 제품은 아직 한 건도 없어 개발 지원을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 배터리에 무용한 소화기로 진화 시도
소방 등에 따르면 불은 지난달 26일 오후 8시 15분경 국정자원 대전 본원 5층 전산실 서버 옆 무정전 전원장치(UPS)용 리튬이온 배터리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화재 직후 건물에 비치된 할론 소화기로 불을 끄려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현장에 도착한 소방대원도 같은 소화기로 진압을 시도했으나, 7분 뒤 배터리에서 다시 불길이 치솟았다.
할론 소화기는 분말 대신 할로겐 가스를 분사해 잔재가 없다는 장점이 있다. 전산실이나 미술관 등 데이터 손상이나 문화재 훼손을 최소화해야 하는 공간에서 주로 쓰인다. 그러나 리튬 배터리 화재에는 무력하다. 배터리 내부에서 화학 반응으로 온도가 1000도까지 치솟는 ‘열폭주(thermal runaway)’가 발생하면 연소가 지속해서 이뤄져 가스나 분말의 단발적인 분사로는 끄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배터리 열폭주를 잡으려면 액체 약제가 효과적이라고 알려졌지만, 아직 그 효과를 소방청으로부터 인증받은 소화기가 없다. 30일 소방청에 따르면 소화기는 소방시설법에 따라 한국소방산업기술원으로부터 형식 승인과 제품 검사를 거쳐야 유통할 수 있는데, 이 절차를 통과한 제품이 없다는 뜻이다.
소방청은 지난해 6월 경기 화성시 아리셀 공장 사고로 23명이 숨지는 등 리튬 배터리 화재가 빈발하자 같은 해 12월 소형 리튬 배터리 화재용 소화기 인증 기준을 만들었다. 하지만 9개월째 해당 기준을 만족하는 제품은 등장하지 못한 상태다. 게다가 이 기준은 가정용 전자기기나 소형 장비를 겨냥한 수준일 뿐 대형 에너지저장장치(ESS) 배터리 화재와는 거리가 있다. 소방청 관계자는 “열폭주를 막을 약제에 대한 국제 공용 기준도 없다”며 “결국 현재로선 물에 배터리를 담그는 ‘냉각’ 방식이 유일하다”고 말했다.
공백이 이어지는 사이 온라인 시장에는 ‘리튬 배터리 전용 소화기’라는 이름을 달고 검증되지 않은 제품들이 우후죽순 쏟아지고 있다. 본보 취재팀이 30일 주요 인터넷 쇼핑몰에서 ‘리튬 배터리 소화기’를 검색해 본 결과 가격이 10만∼200만 원에 이르는 제품이 수십 종이나 판매 중이었다.
한 판매업체는 “리튬 배터리 화재에 최적화됐다”는 홍보 문구를 내걸었고, 또 다른 업체는 “학교·공공기관 납품 실적이 있다”며 신뢰를 강조했다. 네이버 검색어 트렌드에서도 지난달 26일 이전 0건에 머물던 ‘리튬 배터리 소화기’ 검색량이 화재 직후 29일에는 100건으로 급증했다. 소방청은 올해 1, 2월 온라인 판매 제품 단속에서 미인증 소화기 19건을 적발한 바 있다. 소방청 관계자는 “공식 인증이 없는 상태에서 ‘배터리 전용’이라는 문구로 판매하는 것은 과장·허위 광고에 해당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부 내에서도 혼란이 발생하고 있다. 지난해 소방청 관련 기준과 인증 제품이 부재한 상황에서 행정안전부가 한 업체의 리튬 배터리 소화기에 ‘재난안전제품 인증’을 한 것이다. 행안부는 방재 목적이 아닌 산업 진흥 촉진 과정에서 이를 인증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용재 경민대 소방안전학과 교수는 “배터리 화재 사고가 계속 늘어나는 만큼 관련 연구 공모, 외국 제품 성능 테스트 등을 통해 전용 소화기 제품을 개발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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