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유전자 속에 차곡차곡 기록된 생존의 역사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6월 7일 01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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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 신작
과거의 환경-진화 과정 알 수 있어
◇불멸의 유전자/리처드 도킨스 지음·이한음 옮김/496쪽·2만5000원·을유문화사


책 ‘이기적 유전자’로 유명한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신작. 이번엔 유전자가 ‘살아있는 역사책’임을 강조하는 책을 출간했다. 유전자가 단순히 생물의 형질을 결정하는 요소가 아니라 조상들이 겪어 온 환경과 생존 전략, 적응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는 관점을 제시한다.

그는 현대 생명체의 유전자를 ‘팔림프세스트(palimpsest)’라고 설명한다. 팔림프세스트란 여러 차례 글씨가 적힌 양피지를 말하는데, 고대와 중세에는 양피지가 매우 비쌌기 때문에 이미 글이 쓰인 양피지에 글씨를 지우고 새로 덧써서 재활용했다. 역사가들은 이러한 오래된 양피지를 자외선이나 X선으로 촬영해 지워진 글씨들을 읽어내면서 과거의 흔적을 파헤친다.

이런 다층적 기록이 남은 양피지, 팔림프세스트와도 같은 유전체를 분석하면 그 종이 어떤 환경에서 살아남고 적응하며 진화했는지를 읽어낼 수 있다. 이를테면 다른 새의 둥지에 자신의 알을 몰래 낳는 ‘탁란’ 행위를 하는 뻐꾸기의 비밀도 유전자로 읽을 수 있다. 암컷 뻐꾸기들은 자신이 자란 둥지의 새를 정확히 기억해 같은 종의 새 둥지에 비슷한 알을 낳는다. 이는 알의 색과 무늬를 결정하는 유전자가 암컷의 염색체에 있기 때문이며, 뻐꾸기의 유전체를 분석하면 그 종이 대대로 어떤 새의 둥지에 알을 낳았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또 북미의 터키대머리독수리와 유라시아 독수리는 유전적으로 매우 거리가 먼 동물들이지만, 비슷한 환경에 적응하면서 비슷한 외형과 행동을 갖게 됐다. 이는 유전체가 생물의 모양이나 행태를 결정하고 지시하는 정해진 ‘설계도’가 아니라 외부 환경과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유전체에 기록된 여러 흔적을 분석하는 것은 과거의 생태와 진화사를 해독하는 일이 된다.

도킨스는 유전체 해독 기술이 발전하면 화석이나 유물보다 더 정밀하게 과거를 복원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그는 유전자가 개체와 종이 사라져도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불멸의 정보’임을 강조한다. 유전자 해독을 통한 ‘유전적 고고학’의 미래를 특유의 명확한 문체와 풍부한 사례, 일러스트로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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