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불운한 시대의 그림자바람 한 점 없던 1925년 유월 초엿새, 경기 고양군 한지면 이태원 288번지 허름한 초가 집에서 스물아홉 김준상이 삶의 끈을 스르로 내려놓았다. 오후 다섯 시, 해는 서산으로 기울기 시작했고, 싸늘하게 식은 그의 몸은 외양간 기둥에 매달려 있었다. 문간을 들어서던 아내 이씨의 비명은 그 조용한 죽음을 흔들어 깨우기엔 너무 늦었다. 스무 살 너무 어린 나이에 홀로 남게 된 그녀는 그저 망연히 남편의 주검을 바라볼 뿐이었다.
준상은 본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가세가 점점 기울자 7년 전 형 익상과 함께 고향을 떠나 용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두 형제는 거친 막노동으로 하루를 버티었고, 비록 고되었으되 서로의 등을 기대며 견뎌냈다. 허나 그 짧은 평화도 잠시, 형 익상이 홀연히 상해로 떠나 의열단의 일원으로 독립운동에 몸을 던지면서 준상의 삶은 송두리째 바뀌어 버렸다.
형이 떠난 후, 준상의 어깨는 무거워졌다. 용산 제탄소에서 마차를 몰아 얻은 푼돈으로 노모와 형수, 어린 조카, 그리고 젊은 아내까지 다섯 식구의 입에 풀칠해야 했다. 새벽 이슬을 맞으며 나가 밤늦게야 돌아오는 고된 나날이었으나, 그 힘겨움보다 더 그를 짓누른 것은 마음속 깊이 스며든 절망이었다. “간곤(艱困)하여 살 수 없으니 내가 죽겠다.” 그는 몇 번이고 그리 중얼거렸다 한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 말은 단순한 푸념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지난 6일 집안 가족들이 동막리로 나간 동안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다.
● 형의 그림자, 동생의 굴레준상의 형 김익상은 이 땅의 민초라면 누구나 알 법한 이름이었다. 평양 숭실학교 출신으로, 가난 속에서 자랐으나 나라 잃은 설움에 불타 광성연초공사를 박차고 일어나 1920년 중국 펑톈으로 건너갔다. 거기서 의열단장 김원봉을 만나 조선의 독립을 위해 요인 암살에 나설 것을 결단했으니, 그 뜨거운 피는 조선총독부 안으로 던져진 폭탄 한 발로 만천하에 알려졌다. 1921년 9월 12일, 총독부 회계과를 산산조각 낸 그 폭탄은 비록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암살하지는 못했으나, 일제에 맞선 조선 민중의 분노와 독립에 대한 염원을 똑똑히 보여주었다.
7개월이 지난 1922년 3월 28일, 상하이 부두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저격하려다 실패한 청년이 체포되었다. 조사 결과 그는 그는 바로 총독부 폭탄 투척의 범인, 김익상이었다. 도쿄로 이송돼 재판을 받은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무기징역, 다시 20년형으로 감형되어 혹독한 옥살이를 하고 있었다. 1922년 5월 20일자 동아일보는 “총독부에 폭탄을 던진 이는 상하이에서 다나카 대장을 저격한 바로 그 청년”이라 대서특필하며, 한 조선 청년이 일제의 핵심 권력에 두 차례나 타격을 가하려 한 사실을 온 조선에 알렸다. 김익상의 이름은 그렇게 민족적 영웅담으로 기록되었으니, 그의 용기는 수많은 이들의 가슴에 뜨거운 불씨를 지폈다.
허나 그 영웅담의 뒤편에는 준상과 그의 가족들이 감내해야 할 엄혹한 현실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형의 행적이 경찰의 추적 대상이 되면서, 준상의 집은 늘 감시의 눈길을 피할 수 없었다. 심지어 익상이 총독부 폭탄 투척 직전 경성으로 잠입했을 때도 그는 동생 준상의 집을 은신처로 삼았다. 준상은 묵묵히 형의 뜻을 헤아려 그를 숨겨주었으니, 그 시간들이 얼마나 불안하고 고통스러웠을지는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독립운동가의 동생이라는 이름은 그에게 명예나 보호 대신, 끊임없는 감시와 신문, 그리고 견디기 힘든 경제적 곤궁만을 안겨주었다.
● 조용히 스러져간 한 시대의 증인준상의 죽음은 단지 개인의 비극이 아니었다. 그것은 시대의 현실이 만든 비극이자, 이름 없는 이들의 고통을 대변하는 또 하나의 사건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의 불쌍한 죽음을 애도하며 돈을 모아 상여를 사고 장례를 치렀다. 초라한 장례식이었으되, 그들의 정성은 준상의 마지막 길을 조금이나마 덜 외롭게 해주었다. 남은 유족은 노모와 형수, 아내, 그리고 어린 조카 하나뿐이었다.
김익상의 투쟁이 조선 독립의 불꽃이었다면, 김준상의 죽음은 그 불꽃 뒤에 드리운 희생의 그늘이었다. 그는 싸우지 않았지만, 형의 싸움을 지켜보다 스러져갔다. 신문 한 귀퉁이에 실린 그의 죽음에 대한 짧은 기사는 어쩌면 스러져간 수많은 이름 없는 민초들의 삶과 죽음을 대변하는 것이었으리라. 식민지 조선의 어둠 속에서 조용히 무너져간 그의 삶은,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한 시대의 증인이었다. 준상의 죽음을 당시 동아일보는 ‘불운아’로 이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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